[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기기묘묘’(奇奇妙妙). 놀랄 만큼 너무나 기묘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무엇에 대한 얘기라 해야 맞다. 그 ‘무엇’은 한 가족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하는 ‘관념’이기도 하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가족을 통해 그려지는 일상 속에서 ‘그것’을 찾아야 하니 사실 적당한 표현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것보다 더 기묘한 느낌이 이 가족의 공간을 지배한다. 그래서 그들은 ‘기기묘묘’해 보인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을 쓰려면 이 영화 속 공간과 인물들의 상관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모두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일 가능성도 높다. 다시 말하면 ‘기기묘묘’ 자체가 그걸 느끼게 만들어 버린 이 영화의 ‘미혹’일 수도 있단 얘기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 속 공간이 뿜어내는 기운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함’을 느껴야 한단 강박에 짓눌려 그 자체가 ‘기기묘묘’함이라고 강제적으로 느끼게 끌려간 것이라면, 결과적으로 모든 설정의 설계 속에 완벽하게 빠져든 것이라 확신해도 무방하다. 영화 ‘미혹’은 그 자체로 의심과 확신의 중간 어디쯤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감정의 함정이다. 스스로도 빠진 것인지, 그리고 그걸 피한 것인지. 아니면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깊고 어둡다.
‘미혹’은 한 가족의 얘기다. 네 명의 아이를 키우는 현우(박효주)와 석호(김민재) 부부. 그들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셋째 아들을 잃는다. 비극적 죽음이다. 그 죽음을 잊기 위해 새로운 아이 ‘이삭’을 입양한다. 목사인 남편 석호는 기독교 원죄의식 그리고 부모로서의 죄책감 중간 어딘가에 존재하는지도 모를 의무를 가장한 필요에 따라 아내 현우에게 입양을 권한다. 현우 역시 마뜩잖은 듯하지만 남편 결정을 따른다. 그들은 이삭을 통해 사고로 잃은 셋째 아들 빈자리를 메우려 한다. 사실상 여기서부터 ‘미혹’은 ‘홀리기’ 시작한다. ‘누구를’ 그리고 ‘무엇으로부터’인지는 ‘미혹’ 그 자체만 알고 있는 듯하다.
영화 '미혹' 스틸. 사진=(주)엔케이컨텐츠
일단 시선을 사로 잡는 건 석호와 현우 부부의 남은 세 자녀다. 큰 딸과 둘째 딸 그리고 막내 아들. 뭔가 숨기는 듯하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미혹’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어린 아이들의 생존술이라면 영특하다. 하지만 반대로 목적을 가진 행동이라면 섬뜩할 뿐이다. 세 아이는 단단하게 하나로 뭉쳐 있다. 그들에게 ‘이삭’은 외부의 불순물처럼 이질적이다. 순수한 자신들의 믿음을 깨는 거짓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첫 째는 단언한다. ‘이삭’을 악마라 규정한다. 기독교에서 ‘거짓’은 그릇된 것이다. 그릇된 것은 나쁜 것이고, 나쁜 것은 악마다. 앞서 언급한 이 가족, 아빠 석호가 그들이 사는 마을 교회 담임 목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 집안이다. 이 집안의 원죄, 즉 죄의식을 씻기 위해 들어온 이삭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집안 자녀들로 인해 ‘죄’ 그 자체로 규정된다. 부모들이 자신들의 원죄를 씻기 위한 도구로 선택한 ‘이삭’, 그리고 ‘이삭’을 배척하는 부모들의 세 자녀. 부모들과 세 자녀 사이 드러나지 않은 비밀. 그것이 존재할지 모를 것이란 의심, 즉 ‘미혹’ 그 차제다.
영화 '미혹' 스틸. 사진=(주)엔케이컨텐츠
그럼 시선은 ‘이삭’에게 향한다. 이삭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당시 그는 생식 능력도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런 아브라함에게 권능으로 내린 아들이 이삭이다. 이런 점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면 이삭은 영화 ‘미혹’ 속 실체 그 자체인 ‘미혹’일 수도 있다. 셋째 아들을 잃은 현우와 석호에게 입양된 이삭은 사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걸 전제로 이 영화를 바라보면 석호와 현우 그리고 그들 세 자녀 스스로의 원죄 의식이 오롯이 드러나는 가장 완벽한 흐름이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설정 하나가 바로 이삭의 눈에만 보이는 죽은 셋째의 존재다. 결과적으로 그 자체로 이삭은 엄마 현우의 죄책감 그리고 석호가 믿고 있던 종교적 신념에 대한 균열 여기에 세 자녀들이 느끼는 두려움 그리고 공포 등 모든 것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삭의 존재는 앞을 볼 수 있지만 눈 앞의 실체 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들 가족의 ‘미혹’을 꼬집는 연출의 시선이라고 한다면 실체 없는 망상의 현실화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영화 '미혹' 스틸. 사진=(주)엔케이컨텐츠
결국 ‘미혹’은 이들의 ‘정신을 홀리는 것’의 실체적 진실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 가지를 더 등장시킨다. 이들 가족의 이웃 ‘영준’(차선우)이다. 영준은 ‘보이면 안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눈에는 이들 가족의 원죄 의식과 죄책감이 고스란히 보인다. 영준은 실질적으로 이들 가족의 상처이고 고통이며 부끄러움이고 비밀이다. 전체 극 안에서 눈에 띄게 기능적으로 움직이는 영준 캐릭터는 이런 해석으로 바라봐야만 옳은 지점이 아닐까 싶다.
영화 '미혹' 스틸. 사진=(주)엔케이컨텐츠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한 가지다. 현우와 석호 그리고 그들의 어린 세 자녀와 입양된 이삭. 그들은 정말 ‘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삭’만 그것을 보고 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삭’은 정말 보고 있기는 했던 걸까. 이 모든 걸 뒤엎고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이런 의심까지 도달하게 된다. 정말 보이지 않는 그것이 ‘존재’는 했던 걸까.
영화 '미혹' 스틸. 사진=(주)엔케이컨텐츠
영화 중간 거실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무엇’을 통해 현우는 드디어 각성한다. 사실 그는 보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다’ 믿고 싶은 ‘미혹’에 빠져 있던 것일 수도 있다. 석호 역시 보이고 있었지만 종교적 신념과 직업적 윤리의식 그리고 교리적 원죄의식 속에서 혼돈하며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믿고 싶은 ‘미혹’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이삭’의 입양 결정이었다. 그리고 어린 세 아이들, 그들은 가장 순수한 목적을 통해 보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공간을 지배하는 두려움을 깨트리고 싶었던 것일 듯하다. 결국 남는 것은 이삭이다. 성경 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믿지 않는 아브라함에게 권능으로 내린 아이였다. 그래서 의문이고 궁금해진다. ‘미혹’ 속 ‘이삭’은 그저 상징적으로 존재한 ‘미혹’ 그 자체였을까.
영화 '미혹' 스틸. 사진=(주)엔케이컨텐츠
‘미혹’, 상징을 넘어 그 이상의 실체 없는 자아의 형상화를 시도한 은유의 수수께끼. 이 영화의 ‘미혹’은 각자의 시선 속에 자리한 실체 없는 자아의 형상화일 뿐이다. 그걸 만들어 낸 감독의 시선, 반드시 경험해 봐야 할 가치적 사유의 실체다. 우린 그저 감독이 던진 미끼를 물었을 뿐이다. 그 미끼는 ‘미혹’이란 실체 없는 형상이며 우린 처음부터 ‘미혹’의 시선에 사로 잡혀 있었다. 개봉은 오는 19일.
P.S. ‘미혹’의 시작 그리고 중간중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의 이미지. ‘미혹’의 손길을 거부하는 듯한 현우의 무의식 속 방어기제의 형상화. 사실 그것조차 관객을 홀리는 ‘미혹’일 수도 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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