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정말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시작해야 할 듯하다. 그가 출연하는 작품과 출연하지 않은 작품을 단 몇 작품이라도 떠올려 보라고 하면 언뜻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다. 이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그의 연기가 정말 뚜렷하게 기억에 남거나 작품에 각인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그가 배우가 아닌 연기로만 그 작품에 존재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자라면 배우에겐 상당히 심한 질책이 되고 나아가 모욕적인 평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자라면 배우로선 더 없는 찬사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전자와 후자 어떤 지점에 속해있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배우의 이름 석자는 분명히 대중들에게 각인돼 있는 데 말이다. 그래서 정말 이상했다. 이 배우의 존재감에 대해서. 하지만 영화 ‘미혹’을 보고 나면 ‘분명히’ 그리고 ‘반드시’ 알게 된다. 이 배우에 대한 평가 그 자체가 앞서 설명한 두 영역 가운데 정확하게 후자에 해당되는 것이란 점을 말이다. 박효주는 그동안 배우가 아닌 연기 자체로만 존재해 왔다. 그리고 ‘미혹’에선 ‘미혹’ 그 자체로 관객들을 ‘미혹’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미 우린 박효주에게 ‘미혹’돼 있었는지도 모를 일인 것 같다.
배우 박효주. 사진=(주)엔케이컨텐츠
‘미혹’은 2년전인 2020년 4월 개봉한 ‘호텔 레이크’ 이후 박효주에게 두 번째 공포 영화다. 하지만 같은 공포라도 분명 다르다. 그래서 ‘코로나19’ 이후 국내 영화 산업이 강제 휴식기에 돌입한 뒤 복귀작으로 ‘미혹’을 선택했단다. 그리고 그의 눈에 ‘미혹’은 공포이지만 공포라고 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았다고. 이건 이런 말이 된다. 공포이지만 공포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한 분위기의 영화였단다. 공포와 감성 그리고 드라마와 판타지 그 어떤 결로도 설명이 안되는 기묘한 장르처럼 다가왔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이상함’이 영화의 장르였다.
“말씀하신 그 ‘이상함’이 이 영화의 장르처럼 저에게도 다가왔어요.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해도 이 영화의 장르와 분위기가 잘 설명이 되더라고요. 까무러칠 정도로 뭐가 나와서 놀라게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공포적 장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이 ‘스산한’ 분위기는 뭘까 싶었죠. 어떤 상황 속에서 인물들이 미쳐가는 그런 과정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그걸 읽어가는 영화가 ‘미혹’ 같았죠.”
올해 5세 딸을 키우는 ‘엄마’ 박효주는 ‘미혹’의 ‘현우’를 연기하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점으로 ‘아이 잃은 엄마’를 상상해야 하는 것이었을 터. 이 질문에 박효주는 잠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오히려 편하고 쉬웠다’고 한다. 엄마가 아이를 잃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고통이다. 하지만 박효주는 상상과 현실을 완벽하게 분리해 접근 했단다.
영화 '미혹' 스틸. 사진=(주)엔케이컨텐츠
“연기는 상상이잖아요. 그리고 전 상상하는 과정이 의외로 편해요. 아이를 잃는다면 슬프고 고통스럽겠죠. 죽기보다 더 힘들겠죠. 그런데 제가 출산하고 나서 찍은 옴니버스 단편 영화가 하나 있었어요. 그 전까지 해왔던 그대로의 과정으로 상상을 하면서 접근했는데 너무 괴롭더라고요. ‘내가 해왔던 방식대로 하면 안되겠다’ 싶었던 적이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미혹’에선 철저하게 박효주와 현우를 분리해서 접근했어요.”
철저하게 분리해서 박효주가 만들어 낸 ‘미혹’의 ‘현우’. 우선 극중에서도 당연히 엄마다. 하지만 어딘가 분명히 다른 엄마다. 네 자녀 가운데 한 아이를 잃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모습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슬픔을 머금고 있지만 그걸 표현하지 않았고, 표현하지 않는다고 그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미혹’의 전체 분위기인 ‘이상함’을 더욱 더 드 높이는 ‘이상한 엄마’ 그 자체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진짜 이상한 엄마 같은 느낌이 있긴 하네요. 내가 아이를 죽인 건 아니지만 당연히 부모로서의 죄책감, 내가 죽인 거나 다름 없다는 것에 대한 마음이 있었겠죠. 그런 마음을 악한 무엇이 이용한다? 그게 아마 극중 보이지 않는 트라우마로 드러났고. 그게 ‘현우’의 베이스였죠. 불안과 슬픔 상처가 뒤섞인 일상 속에서 점점 미쳐가는 가장 순수한 영혼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어요.”
배우 박효주. 사진=(주)엔케이컨텐츠
그렇게 만들어 낸 ‘미혹’ 속 엄마 현우. 앞서 언급했지만 정말 이상했다. 우선 영화도 이상했고, 그 안에 존재하는 엄마 현우도 정말 이상했다. 한 마디로 이상한 모성이었다. 그 이상함은 현우에게 입양된 이삭을 향한 알수 없는 적대감을 드러내는 큰 딸과 엄마의 관계에서 정점을 찍는다. 어느 쪽으로 설명을 하고 해석을 해도 분명 모성이다. 하지만 결코 모성이라고 할 수 없는 모성이기도 하다.
“극중에서 강가에서 촬영하는 장면을 자세히 보시면 제가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모습이 아주 짧게 나와요. 그 장면을 유심히 보시면 ‘미혹’에서 제가 연기한 ‘현우’ 그리고 그의 큰 딸 사이의 관계가 기묘하게 느껴지실 수 있단 걸 저도 이해는 해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모성 자체가 엄마에게 요구되는 희생이라고 해석한다면 ‘미혹’에서 현우가 느끼는 감정과 그의 큰 딸이 느끼는 감정이 분명 온전히 설명이 될 듯해요.”
이런 기이하고 모호한 느낌의 모성 그리고 모녀 관계는 두 사람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놓여 있는 아빠 석호를 연기한 김민재의 존재감이 있었기에 더욱 더 빛을 냈다. 현우의 남편인 석호는 교회 목사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아내 현우의 심연 아래 놓인 죄의식을 건드리고 또한 무의식적으로 큰 딸의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킨다. 여기서 ‘무의식’은 남편 석호조차 의식했는지 아니면 의식하지 못했는지는 관객들도 모른다.
영화 '미혹' 스틸. 사진=(주)엔케이컨텐츠
“제 남편으로 나온 민재 선배(웃음) 진짜 화차 때 처음 봤는데 ‘저 호흡 뭐지’ 싶었어요. 뭔가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은 처음이었어요. 한 번은 꼭 작품을 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저보다 먼저 캐스팅이 됐기에 너무 반가웠죠. 실질적으로 이 영화 출연 결정도 민재 선배가 나온다고 해서 결정했다고 해도 무방해요. 시사회 전 편집실에서 잠깐 영화를 봤는데 그때 전화로 선배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연락 드린 적도 있을 정도였어요. 그냥 선배가 연기하면 전 그 호흡에 리액션만 하면 됐으니까요.”
‘미혹’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히 딥(deep)하고 다크(dark)한 감정으로 스토리를 끌어 간다. 이 정도의 감정으로 이 정도의 얘기를 창조해 낸 감독이라면 분명 보통은 아닐 것이라 느껴진다. 하지만 박효주는 손사래다. 그는 ‘미혹’을 연출한 김진영 감독에 대해 ‘미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랄함이 돋보이는 연출자’라고 소개했다.
“영화 시나리오만 읽어도 우울하고 자기 고집만 강한 그런 분이라고 느껴졌어요. 진짜 말이 안 통할 분 이랄까. 그런데 실제로 만난 감독님은 정말 맑은 눈의 소유자이세요. 진짜 저희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이감독님 이시죠(웃음). 너무 맑고 정직한 느낌도 강하시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미혹’의 가장 큰 반전이 바로 감독님이세요. 하하하. 사실 ‘미혹’을 소화하면서 쉽지 않았어요. 힘들었죠. 그런데 이런 감독님이라면 또 ‘미혹’을 경험한다고 해도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배우 박효주. 사진=(주)엔케이컨텐츠
박효주는 자신의 출연작 가운데 ‘미혹’을 가장 뚜렷함이 있는 작품으로 손꼽을 듯하다. 기존의 장르 영화와 분명 다른 지점이 너무도 강한 작품이다. 단순한 장르 영화에서 ‘미혹’과 같은 결을 찾는 것은 이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박효주가 스크린 전작과 비슷한 장르로 인식될 듯하지만 이 작품의 잔상이 남아 출연을 결정했던 것 같단다.
“제가 소화하기엔 불가능한 작품일 것이라 여겨서 거절하려 했던 작품인데 너무 잔상이 심하게 남아서 다시 읽어보고 결국 출연을 결정한 작품이 ‘미혹’이에요. 내가 ‘현우’를 연기하면 도대체 어떤 표정이 나올까 궁금했었죠. 저희 영화, 무서운 장면으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그런 작품이 절대 아니에요. 정말 진짜 색다른 장르 영화로서의 존재감이 뚜렷한 작품이라고 자부합니다. 꼭 즐겨 주세요.”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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