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의미가 무의미해진 시대다. 경계가 그렇고, 이념이 그렇고, 민족이 그렇다. 누구는 그것을 두고 ‘구태의연’이라 한다. 그래서 지금 정치권의 고위 관료가 ‘조선 패망’ 이유를 식민사관에 빗대 주장하면서도 ‘역사적 팩트’라 소리치는 시대가 됐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틀린 말이 아니다’고 옹호하고 또 누군가는 발언 자체를 비난한다. 결과적으로 그리고 심증적으로 또한 나아가 사실적으로 분명하게 ‘아니다’에 수렴하지만, 그것조차 언어적 유희로 치부되는 듯한 분위기에 몰리며 수면 아래로 끌어 내려지는 사회 분위기에 참담함을 느낀다면 이 영화 속 주인공 ‘필주’(이성민)의 집념 안에서 우린 도대체 무엇을 느끼고 가져와 후대에 전하며 그것을 가르쳐야 할지를 고민하면 될 듯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20대의 인규(남주혁)를 등장시킨다. 80대의 필주가 행동하고 20대의 인규가 그것을 바라본다. 인규는 곧 우리 모두가 된다. 기억해야 할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시대의 의미를 기억하게 만드는 ‘리멤버’다.
‘리멤버’는 얘기 전체의 의미가 무겁고 그 무게만큼 재미도 무겁다. 결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얘기 자체의 주제성이 지금 현재에 고스란히 존재하는 진행형이란 점에서 그 무게는 더욱 가중된다. 또한 그 만큼 우리가 느끼는 재미, 즉 통쾌함이 강렬하다. 일궈낼 수 없는 상상의 행위가 이 영화로 인해 구체화를 넘어 실체화 되니 인물을 응원하게 되고 그 인물의 행위와 목적과 나아감에 심증적으로 힘을 보태며 ‘동일시’하는 과정을 체험한다.
영화 '리멤버'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주인공 필주는 80대 뇌종양 말기 알츠하이머 환자다. 평생을 일하던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 자리를 그만두는 날이 됐다. 필주가 평생 직장처럼 다니던 곳을 그만두는 이유가 있다. 아내가 죽었다. 그리고 자신의 병세가 점점 더 악화돼 가고 있다. 자녀들도 이제 다 모두 장성해 가정을 꾸렸다. 일생을 함께 했던 아내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났다. 이제 필주는 평생을 가슴 속에 묻어 뒀던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지금까지 헌신했다. 이제 스스로를 위해 가슴 속에 묻어뒀던 그 일을 하기로 한다. 무려 60년을 가슴 속에 품었던 일. 총 5명의 원수들을 찾아가 죽이려 한다. 그는 아주 오래된 총을 한 자루 꺼낸다. 한 눈에 봐도 오래돼 보인다. 권총에는 청원(淸原)이란 한 자가 새겨져 있다.
영화 '리멤버'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필주는 평생을 모은 돈을 가방에 한 가득 담았다. 그리고 직장 동료였던 인규를 찾아간다. 두 사람은 나이를 뛰어 넘은 둘 도 없는 절친이다. 필주는 빨간색 포르쉐 스포츠카 키를 인규에게 건내며 운전 기사 노릇을 부탁한다. 물론 대가는 거절할 수 없는 거액. 인규는 산업 재해를 당한 아버지 치료비를 대기 위해 사채를 끌어다 쓴 상태다.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필주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고성능 스포츠카 운전 기회도 매력적이다. 두 사람을 태운 고성능 스포츠카는 굉음을 내면서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영화 '리멤버'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는 다분히 작위적이다. 꾸며서 만들어 낸 느낌이 너무 강하다. 이 영화 속 상황과 소재는 결코 작위적이진 않다. 하지만 이걸 소화하는 단계까지 끌어가기 위해 필요한 여러 요소 배치와 사용 방식이 지극히 작위적이란 얘기다. 우선 두 사람의 패밀리 레스토랑 닉네임. 필주는 ‘프레디’ 그리고 인규는 ‘제이슨’. 프레디는 할리우드 고전 공포 영화 ‘나이트 메어’ 속 주인공 ‘꿈 속 살인자’ 이름. 제이슨은 죽은 아들을 대신해 복수에 나선 가면 쓴 엄마 캐릭터 이름. 다시 말해 꿈에서도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복수의 대상을 향한 고성능 질주에 대한 일종의 직유적 표현 방식이 두 사람 설정과 스포츠카 등장에 오롯이 담겨 있는 듯하다.
영화 '리멤버'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시종일관 굉음을 터트리며 달리는 빨간색 스포츠카 ‘포르쉐’의 질주처럼 ‘리멤버’는 의외로 강력하고 빠르다. 80대 노인의 복수 액션이란 코드와는 결코 맞지 않는 의외의 엇박자 리듬감이다. 사건의 인과 관계를 관객이 인식하고 납득하기 전 이미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관객의 인식을 현장으로 이동시킨다. 등장 사건을 통한 관객의 감정 이입보단 전체 설정 안에서 움직이는 역사적 인식론으로 그것을 대체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개개인의 취향과 관람 방식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인물의 감정을 느끼고 공감해야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단 점은 분명 단점으로 작용하겠지만 역사적 사건 흐름과 그 흐름의 명분이 갖는 당위성 측면에선 분명 공감의 장점을 드러낼 만한 지점도 갖추고 있다.
영화 '리멤버'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역사적 사건 흐름과 명분이란 측면의 당위성은 이 영화 속 5명의 빌런이다. 필주가 처단해야 할 죄인들. 현재를 살아가는 친일파들. 과거 친일 소작농 출신이었고 현재는 대기업 총수, 친일 역사관을 퍼트리고 주장하는 역사학자, 일제 강점기 분명한 친일 행위자였지만 한국전쟁 참전 이후 전쟁영웅으로 추앙 받는 군 장성. 마지막으로 모두가 깜짝 놀랄 인물. 바로 아픈 역사의 흐름을 고스란히 방관한 죄인. 이들 모두가 현실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과 캐릭터들이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건 영화의 의도라기보단 현실의 진행형이 가져온 ‘이입’ 때문일 것이다.
영화 '리멤버'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결과적으로 ‘리멤버’는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필주의 행위를 응원하고 그의 행동을 지지하게 만든다. 당연하다. 필주의 곁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에 받아 들이는 인규의 존재 역시 우리의 몫으로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제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목적이 의도를 넘어서는 순간 그리고 재미가 의미를 넘어서는 순간을 적절히 조율하지 못한 지점은 ‘리멤버’에서 느낄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을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영화 '리멤버' 스틸.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물론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리멤버’의 의미를 찾자면 2022년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영화 속 상황의 아이러니다. 그래서 이 영화 제목이 ‘리멤버’ 즉 ‘기억’인 듯하다. 의미가 무의미해진 시대에 기억되지 못하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다시 한 번이라도 되새김질 해보라는 의미는 아닐까 싶다. 오는 26일 개봉.
P.S 필주의 오래된 권총에 쓰여진 한자 ‘淸原’, 한자 그대로 풀어 보자면 ‘맑고 푸르른 언덕’이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기억 속 언덕이 있다. 필주 스스로의 죄책감 그리고 삶의 회귀에 대한 상징적 의미일 듯하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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