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충범 기자] 최근 수년 새 지속되는 전쟁과 기후 변화에 국내 식탁 물가가 출렁이고 있습니다. 이들 요인은 국내 물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장기적 흐름에서 상방 압력으로 작용하는 변수라는 점에서, 다소 막연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인데요. 실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원자재 수급 불안이 심화하고,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 재해로 식료품 물가가 오르는 '기후플레이션'마저 현실화하면서 식량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는 실정입니다. 문제는 식탁 물가를 둘러싼 이들 악재가 단기간 내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부가 식량 안보 문제를 피상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이를 인플레이션 문제와 결부해 식량 주권을 장기적으로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시기를 맞이했다는 제언도 나옵니다.
종식될 기미 보이지 않는 전쟁…곡물 가격 불안정 양상 지속
지난 2022년 2월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글로벌 식량 수급 판도 전반을 뒤흔드는 모습입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경기 침체를 둔화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상황인데요. 이렇듯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다른 전쟁과 비교해 식량 안보에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하는 것은 먹거리의 토대인 곡물 가격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 프레리(Prairie), 아르헨티나 팜파스(Pampas)와 함께 '세계 3대 곡창지대'로 불립니다. 이 같은 배경에는 우크라이나 국토의 상당한 면적이 '체르노젬(Chernozem)'이라는 흑토로 덮여있는 점이 한몫하는데요. 흑토는 영양분이 풍부하고 많은 양의 수분을 머금고 있어 농업 생산량이 우수한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4일 미국 농무부(U. S. Department of Agriculture)에 따르면 이 같은 흑토를 토대로 우크라이나는 지난 2021~2022년 기준 전 세계 옥수수 수출의 12%, 밀 수출의 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각각 세계 4위, 5위에 해당하는 높은 수준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빵 바구니'로 불려온 이유기도 하죠.
이처럼 주요 곡창지대 국가의 전쟁이 장기화하고 있으니, 국제 곡물 가격 역시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지난 2022년 3월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거래된 소맥(밀) 선물가격은 부셸(27.5㎏)당 1425센트까지 치솟으며 전년 말 대비 84.9% 급등한 바 있습니다. 또 같은 시기 옥수수는 765센트까지 오르며 전년 말 대비 28.9% 상승했는데요. 전쟁으로 농토가 망가지고 러시아가 수출로를 차단한데 따른 부작용입니다.
올해 들어서는 2년 전 대비 식량 가격의 상승세가 전반적으로 둔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정성은 지속되는 있는 상황입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지난달 세계식량가격지수는 전월 대비 0.9% 상승한 120.4포인트를 기록했는데요. 이 지수는 지난해 7월(124.6포인트) 고점을 찍은 이후 7개월 연속 하락했다가, 올해 3월 오름세로 반전된 이후 세 달 연속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세부적으로 유지류는 전월보다 2.4% 하락한 127.8포인트, 육류는 0.2% 낮아진 116.6포인트였지만 곡물가격지수가 6.3% 급등하며 118.7포인트를 기록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특히 국제 밀 가격이 크게 올랐는데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영향으로 흑해 지역의 항구 시설이 파손된 것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기후플레이션' 본격화…물가 상승률 견인 악순환
이상 기후 문제도 식량 안보에 심각한 위협 요인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잦은 이상 기후에 따른 폭염 및 폭우가 작황 악화에 영향을 미치고, 이로 인한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는 기후플레이션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간 기후 문제는 하늘의 뜻인 만큼 돌발 변수 정도로 치부돼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상 기후가 발생하는 빈도가 과거보다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력 강화에 나서야 한다는 분석이 제기됩니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상 기후 현상은 농산물 생산량 저하로 직결되는 추세입니다. 이는 해당 식재료를 필요로 하는 먹거리들의 물가를 다시금 끌어올리는 악순환으로 작용하고 있는데요.
지난 3월 유럽중앙은행과 독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는 오는 2035년까지 기후 변화로 인해 매년 식료품 가격이 0.92~3.2% 정도 오를 것으로 관측한 바 있습니다. 아울러 이로 인한 연간 세계 물가 상승률은 최대 1.2%포인트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는데요.
최근 전 세계적으로 폭등하고 있는 올리브유 가격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1월 국제 올리브유 가격은 1톤(t)당 1만88달러를 기록하며 분기 사상 최초로 1만 달러를 넘겼습니다. 지난해 1분기 1t당 5926달러와 비교하면 1년 새 2배 가깝게 오른 수치입니다.
이는 전 세계 올리브유 생산의 60%를 차지하는 스페인에서 이상 기후에 따른 가뭄으로 생산량이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무더위 여파로 올리브 열매가 제대로 맺히지 못한 것이죠. 올리브유는 상당수 요리에 두루 쓰인다는 점에서 급등 시 식탁 물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코코아 가격도 이상 기후에 최고치를 경신하는 상황입니다. 코코아 선물 가격은 지난 10년간 1t당 2000달러 선을 유지해왔다가, 지난해부터 급격히 오르면서 최근 9000달러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는 코코아 주요 산지인 서아프리카의 가나, 코트디부아르에서 엘니뇨 현상으로 인해 코코아 나무가 병해를 입으며 생산량이 급감한 까닭입니다. 이처럼 코코아 가격이 급등하면서 이를 주원료로 사용하는 과자, 아이스크림 등 가공식품 역시 가격이 줄줄이 오르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올 여름 때 이른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농수산가에서는 폭염 및 폭우로 인한 작황 악화 우려가 커지고 있는데요. 지난해 물가 상승의 단초가 됐던 사과를 비롯한 과채류의 가격이 이미 폭등하기 시작하고, 서민 식탁의 필수품인 김의 경우 주산지인 전남 완도 일대 수온 상승에 따라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가격이 연쇄적으로 상승하는 추세입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글로벌 식량 위기가 국내로 전이되는 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 만큼 식량 자급화가 시급해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응은 아직 미흡한 실정"이라며 "제한된 우리 자원 경제 규모 상 완벽한 자급자족을 이뤄내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정부 차원에서 이 같은 기후 리스크를 관리하고 식량 주권을 강화할 수 있는 장기적인 계획 수립을 고민할 때가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 중인 가운데 지난 6월 30일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전선에서 우크라이나 정찰 대원들이 러시아 진지를 향해 드론을 띄우고 있는 모습. (사진=AP/뉴시스)
김충범 기자 acechung@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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