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에서 읽기와 쓰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 글에선 말하기의 가치와 방법을 살펴보겠다.
먼저 퀴즈를 하나 내겠다. 상대가 누구든지 말싸움을 할 때 항상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답은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내 맘대로 말하는 것이다. 말을 싸움의 수단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솔깃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말을 소통의 수단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헛웃음만 나는 시답잖은 농담일 것이다.
세상은 바야흐로 말 잘하는 사람의 시대가 됐다. 말 잘하는 사람은 강연이나 연설의 자리에 초청을 받고 TV와 라디오, 유튜브를 종횡무진한다. 이렇게 거창한 차원이 아니더라도 소소한 일상생활이나 평범한 직장 안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뜨거운 환영을 받고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말을 잘한다는 건 뭘까? 사람들은 흔히 끊이지 않고 말을 이어가면 말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을 달변가라 부른다. 달변은 말 잘하기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말 잘하기는 말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상대가 내 말을 듣고 내용에 동의하거나 취지에 공감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말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 무엇인지 잘 아는 것이 현명하다. 먼저 말에는 용건이 있어야 한다. 용건은 상대에게 생각의 변화, 행동의 변화를 주려는 결정, 판단이다. 그 다음 이 용건을 설득하기 위한 근거가 필요하다.
용건은 타당해야 한다. 타당하지 않은 용건을 제시하는 것은 상대를 기망하거나 현혹하려는 행위다. 근거는 구체적이고 생생해야 한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내용만 제시하면 상대는 정서적 공감을 할 수 없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표현으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도록 말해야 상대의 마음이 움직인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는 말은 커뮤니케이션에서 정서적 공감의 결정적 역할을 웅변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가족, 학교, 회사 내에서 이뤄지는 말의 대부분이 이런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집단 안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의 말은 용건이 분명하지만 근거가 무시되거나 허약한 경우가 빈번하다. 굳이 상대를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비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의 말은 근거는 구구하지만 용건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근거는 차고 넘치지만 그걸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용건으로 제시할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타당한 용건과 구체적이고 생생한 근거를 막힘없이 주고받아야 관계도 좋아지고 능률도 오르고 행복감도 느낄 것이다. 말의 레토릭이나 에티튜드를 강조하는 콘텐트나 교육은 넘쳐나지만 말의 기본 요소를 역설하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다. 기본 요소가 튼실해야 레토릭이나 에티튜드가 비로소 의미를 가질 텐데도 기본 요소가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
혁범성성(革凡成聖)이란 말을 좋아한다. 평범한 사람도 혁신을 통해 거듭나면 완성된 인간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읽기, 쓰기, 말하기는 혁범성성의 과정이다. 리터러시가 시민권인 21세기 정보화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읽기, 쓰기, 말하기로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다. 읽기, 쓰기, 말하기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꿈꿔본다.
백승권 비즈라이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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