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기 싫어요.”
장손으로 태어난 아들이 조부모님 댁에 가기 싫다고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얼마 전 추석을 앞두고 스무 살 성인이 된 아들은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첫째인 게 너무 싫다고 말이다. 아들은 친가에서만 첫째인 게 아니다. 외가에서도 동생들뿐이다. 덕분에 사랑을 독차지했다. 첫 손주에 첫 조카였으니 오죽했겠는가. 세상에는 공짜가 없어서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에 보답을 해야 하는 법이다. 하여 부모인 나는 아들을 키우는 동안 첫째로서 의젓하고 어른들께 예의바르게 행동할 것을 자주 교육시켰다. 다행히 아들은 주변의 기대에 잘 부응했고 학창시절 내내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건 완전한 내 착각이었다. 아들은 그렇게 사는 동안 꽤 힘이 들었던 것이다.
“할머니, 제발 에어컨 좀 틀자!”
임신 중에 제사상에 올릴 전을 부치는 손녀를 위해서는 선풍기 하나가 고작인 할머니. 그러나 성진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는 부랴부랴 에어컨을 튼다. 모든 시선을 성진에게 고정시키는 이는 할머니만이 아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고모 등 집안의 어른들이란 어른들은 죄다 똑같다. 왜냐고? 성진이 바로 경상도의 보수적인 김씨집안의 장손이어서다. 영화 <장손>의 주인공 말이다.
성진이 사랑을 받은 대가로 해야 할 일은 여러 가지다. 할아버지를 따라 선산에 오르고, 할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리는 것은 물론, 엄마가 시누이를 험담할 땐 맞장구도 쳐주어야 한다. 술만 마시면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는 아버지를 상대해야 하는 것도 성진의 몫이다. 겨우 이 정도라면 영화를 보는 우리가 성진이가 된 듯 답답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새끼’를 입에 달고 사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성진의 위치는 확연히 달라진다. 장손의 일이란 집안에 큰 일이 생겼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죽음은 죽음 자체로 끝나지 않고 다른 일의 서막이 되었다. 바로 유산다툼. 큰고모와 아버지, 그리고 치매가 심해지는 할아버지 사이에는 매일 큰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보이는 곳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2대째 운영 중인 두부공장을 물려받지 않겠다던 선언은 가벼운 축의 반항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 성진이다.
매장이냐 화장이냐, 제사를 지내느냐 마느냐, 유산은 어떻게 처리하느냐 등의 문제는 해묵은 질문이 아니라 현재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명절 때마다 어느 집이든 밥상머리 주제로 오르는 얘깃거리다. 그렇지만 집안의 어른들이 살아계시면 환갑이 지난 나이의 사람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예민한 주제이기도 하다. 많이 희미해지고 퇴색하고 있지만 전통의 힘은 여전히 세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불을 보존하는 것이지 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던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말만큼이나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말 역시도 진리다. 그래서 어렵다.
<장손>의 오정민 감독은 결국 성진에게 공을 넘긴다. 윗세대의 갈등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의 길을 열 결정권은 이제 성진이 쥐고 있다. 권리가 주어진 만큼 책임도 따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진의 결정이 끼칠 반향은 단지 김씨집안에만 머물지 않으리란 점이다. 오감독은 성진으로 대표되는 많은 MZ세대에게 전통이 우리의 목을 조이지 않고 가족이 더 이상 징글징글한 관계가 되지 않을 해법을 찾아볼 것을 조심스레 주문한다.
아마 내 아들도 이 대열에 곧 합류하게 될 것이다. 고민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아들이 그 무게를 감당할 동안 엄마이자 윗세대인 나는 아들의 무게를 덜어줄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아주 기꺼이.
이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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