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디지털 대전환과 액화 노동 - 경계가 흐려진 노동의 미래
2024-10-11 06:00:00 2024-10-11 06:00:00
기술 발전은 효율성과 혁신을 가져오지만, 이로 인해 노동의 형태는 고체에서 액체로 변모하고 있다. 전통적인 정규직 노동은 고정된 출퇴근 시간과 근로시간, 명확한 업무 경계와 같이 고체처럼 견고한 구조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노동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흐릿해졌다. 현대의 노동은 고정된 근무 시간이나 업무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수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특성을 가진다. 플랫폼 노동이나 파견, 아르바이트 같은 파편화된 노동은 고체가 녹아 흘러내리듯, 전통적인 노동 구조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중앙대학교 이승윤 교수는 이러한 노동 형태를 "액화 노동(Melting Labor)"이라는 용어로 설명했으며, 이는 노동의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나타내는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자동화, 인공지능(AI), 빅데이터 같은 기술들이 전통적인 제조업, 서비스업, 금융업 등 다양한 산업에 도입되면서 고정된 일자리는 줄어들거나 사라지고 있다. 특히 플랫폼 노동은 대표적인 액화 노동의 유형이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전통적인 고용 관계에서 벗어나 유동적인 업무를 수행하며, 이로 인해 기존의 근로기준법으로는 충분히 보호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배달앱을 통해 일하는 라이더의 사례를 보면, 이들은 플랫폼 회사와 고용 계약을 맺지 않고, 필요에 따라 일을 수행한다. 정규직과 달리 이들의 근로시간은 일정하지 않으며, 플랫폼 회사의 정책에 따라 임금 구조와 노동 조건이 달라진다. 이러한 플랫폼 노동자들은 고용 안정성과 사회적 안전망에서 배제되며, 임금 변동성과 과도한 노동 시간으로 인해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플랫폼 노동자뿐만 아니라, 전통 산업 속에서도 액화 노동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현대자동차의 자동화 도입에 따른 공장 노동자 모습에서도 액화 노동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존의 숙련된 노동자들의 역할이 축소되거나 비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 고정된 일자리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전통 산업에서도 액화 노동이 확산되고 있다.
 
액화 노동의 확산은 여러 법적 쟁점을 낳고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근로자성 인정 여부다. 전통적인 정규직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에 의해 보호받지만, 액화 노동자는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플랫폼 노동자는 고용주와의 계약 관계가 불명확해 법적으로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아, 고용 안정성이나 임금 보장, 사회적 안전망에서 배제되고 있다. 
 
또 다른 법적 쟁점은 노동 시간 및 임금 문제다. 액화 노동자는 고정된 근로시간 없이 유동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임금 구조가 불안정하고 경제적 안정성을 보장받기 어렵다. 특히 플랫폼 노동자들은 성과급이나 수수료 기반의 임금 구조로 인해 수익이 불투명하고, 플랫폼 회사의 수수료 정책에 따라 임금이 크게 변동할 수 있다. 이들은 휴식 시간이나 노동 시간 제한에 대한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해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며, 건강과 안전에도 위협을 받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의 결여 또한 중요한 문제다. 액화 노동자들은 고용보험이나 산재보험 같은 사회적 안전망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거나 개인사업자로 분류되기 때문에 사회보험 혜택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배달 라이더가 업무 중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산재보험 적용이 어렵고,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이는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로 인한 대표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액화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에 대한 전면적인 대(大) 개정이 필수적이다. 정규직 노동자 중심으로 설계된 법적 보호 체계를 보완하고, 액화 노동자들에게도 최소한의 법적 보호가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산재보험, 실업급여 등의 사회보험 혜택을 비정형 고용 형태의 노동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도록 법적 패러다임을 보완해야 한다. 이와 함께, 플랫폼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고용 형태에서 비롯된 사고, 실직, 질병 등의 위험에 취약하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전제로 한 노동법 혁신이 필요한다.
 
"미래의 노동자는 창조적이거나 없어질 것이다." 
 
앨빈 토플러의 이 명언은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직면한 노동자들이 마주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기술 발전은 노동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있지만, 그로 인해 노동자가 소외되지 않도록 적절한 사회적 안전망과 법적 보호가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 기술은 발전하고 경제 구조는 변화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철저한 고민과 제도 혁신의 추구이다. 
 
플랫폼 경제가 확산되고 AI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산업에 대한 통제가 쉽지 않은 미래에서도, 노동의 가치와 인간다운 삶의 질은 지속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안희철 법무법인 디라이트 파트너 변호사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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