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11월부터 시작된 예산 전쟁 끝에 민주당이 정부 예산안을 뭉텅이로 삭감하면서 정부가 헌정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감액 절벽'에 내몰렸습니다. 윤석열정부 주요 사업으로 불리는 대왕고래 프로젝트의 경우 사실상 전액 삭감이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는데요. 윤석열정부 하반기 핵심 국정과제 추진에 차질이 불가피해졌습니다.
대왕고래 프로젝트 예산, 98% 삭감
내년도 예산안 법정 처리 시한인 2일 국회는 내년도 예산안의 국회 본회의 처리를 마지막 날인 10일까지 합의하기로 했습니다. 민주당이 단독 처리한 '감액 예산안'을 두고 여야가 벼랑 끝 대치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우원식 국회의장이 예산안 본회의 상정을 보류한 겁니다.
앞서 민주당이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단독 처리한 감액안은 4조원 이상 삭감된 673조원 규모입니다. 정부가 4조8000억원을 편성한 예비비에서만 2조4000억원이 삭감됐는데요.
윤석열정부 핵심 사업으로 꼽히는 동해 가스 유전개발 사업인 '대왕고래 프로젝트의 경우 2025년도 예산안 505억원 중 98%인 497억원이 감액됐습니다. 사실상 프로젝트의 싹이 잘린 것과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대왕고래 프로젝트는 이달 중순 경 첫 시추 작업이 시작될 예정인데요. 정부가 1차 시추를 예정대로 진행하려면 석유공사 자체의 예산을 투입해야 합니다. 다만 자본잠식 상태인 석유공사가 이러한 대규모 자금을 마련할 여력이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정부가 예산안에서 힘을 줬던 '의료개혁' 분야 예산도 삭감이 이뤄졌습니다. 전공의 수련환경 혁신지원 예산안 3089억1600만원 중 20% 가량인 756억7200만원이 삭감됐고, 전공의 등 수련수당 지급 예산은 589억원중 174억4000만원이 깎였습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날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야당 단독 감액안 정부 입장 합동브리핑'에 참석해 "예산안 제출 이후 전공의 복귀 지연이 더욱 확실해짐에 따라 상임위 심의 과정에서 여야 합의로 증액하기로 된 예산 확보가 불가능해졌다"며 "특히 비상진료체계 유지 예산과 응급실 미수용 문제 해소를 위한 응급의료체계 강화 예산 등이 반영되지 않게 돼 의료공백에 따른 국민의 불편과 어려움이 더욱 커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출연연구기관과 기초연구·양자·반도체·바이오 등 미래 성장동력 연구·개발(R&D) 예산도 815억원이나 감액됐는데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 내년 경북 경주 개최가 확정된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예산까지 발목이 잡혔습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야당은 청년도약계좌, 대학생 근로장학금, 청년 일경험, 저소득 아동 자산형성과 같은 사회이동성 개선을 위한 대표적 사업도 삭감했다"며 "소상공인 추가지원과 지역경제 활성화 사업 보강도 불가능해진다"고 밝혔습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최상목 부총리 등 관계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야당 단독감액안 정부입장 합동 브리핑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불요불급한 예산만 삭감"…정부·여당 협상력 시험대
민주당은 민생 예산은 삭감하지 않고 불요불급한 예산만 삭감했다는 입장입니다. 예결위 민주당 관계자는 "청년 도약 계좌의 경우 수요를 정부가 과다하게 설정했고 대왕고래 프로젝트의 경우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치라는 의미"라고 전했습니다.
국회에 제출된 예산결산위원회 심사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R&D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예타 폐지 등 다양한 제도개편을 추진하고 있는데, 비효율적인 R&D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노력 또한 지속될 필요가 있으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심의결과를 가급적 존중함으로써 R&D 예산편성 과정의 전문성과 투명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입니다.
또 "보건·복지·고용 분야는 한 번 수혜대상 및 범위가 확대되면 이를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 비가역적 성격의 대규모 의무지출 사업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며 "추계상의 작은 오류에도 재정운용규모가 크게 변동될 수 있으므로 추계의 정확성, 재정의 지속가능성 및 정책효과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예산 심의가 필요하다"고 진단했습니다.
전공의 예산과 관련해서는 "전공의에 대한 수련보조수당은 당시 정부 스스로 사업성과가 낮다고 평가해 지급을 중단한 바 있고 전공의의 기피과목 수급은 근본적으로 의료수가 조정 등을 통해 개선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수련보조 수당 지급은 단기적인 현금성 지원 대책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를 제기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최후의 보루로 예산을 '이용'하는 방안도 언급됩니다. '예산 전용'이 부처 내에서 재량에 따라 예산을 융통하는 것이라면 '예산 이용'은 부처 간 예산을 융통하는 방안인데요. 예를 들면 기재부 예산을 국토부에서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지난 1961년도 예산회계법이 제정된 후 실제 한 번도 시행된 적은 없지만 국정마비 상황까지 갈 경우 활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박상훈 정치평론가는 "대통령실 특활비나 검찰 특활비가 왜 필요한지 동의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겠지만 전공의 없는 상급종합병원 개혁을 위한 예산은 정부·여당이 충분히 야당을 설득해야 하는데 여야의정 협의체만 봐도 비전없이 정치적 이익의 관점에서만 개문발차하다 그렇게 된 것"이라며 "여당이 정말 민생을 강조한다면 남은 기간 동안 주고받으면서 절충점을 찾도록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민의힘 김정재 의원등 중진 의원들이 2일 오전 비상의원총회를 마친 뒤 국회의장실을 방문, 우원식 의장에게 감액 예산안의 본회의 처리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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