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 대 이지스, 이례적 딜 소송에 M&A 시장 촉각
2025-12-12 15:26:23 2025-12-12 18:25:09
[뉴스토마토 신수정 기자] 흥국생명이 이지스자산운용 매각 과정의 절차적 불공정을 이유로 고소전을 시작하면서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의 시선이 쏠리고 있습니다. 매도인의 광범위한 재량권과 입찰 투명성 의무를 다투는 이례적인 법적 공방이기 때문인데요. 최고가 제시에도 탈락한 흥국생명이 딜 방식 번복과 정보 유출을 주장하고 있으나, 관행을 넘어선 법적 구속력 있는 약속과 구체적인 불법행위를 입증할 물증을 확보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 될 전망입니다. 소송 결과에 따라 M&A 시장에 관련 기준이 새로 정립될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입니다. 
 
흥국생명과 이지스자산운용 사옥. (사진=각 사)
 
'불공정 입찰' 소송전 돌입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이지스자산운용 매각 과정에서의 불공정 입찰 의혹을 제기하며 법적 공방에 전면적으로 나섰습니다. 흥국생명은 전날 서울경찰청에 이지스자산운용 최대주주 A씨와 매각을 주도해온 주주대표 B씨, 공동 매각 주관사 모건스탠리 한국 투자은행(IB) 부문 대표 C씨 등 5명을 공정 입찰 방해 및 부정거래(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매각주관사로부터 지난 10일 차순위협상대상자로 지정됐다는 안내를 받고도 소송전에 돌입했습니다.
 
이번 소송의 핵심 쟁점은 갑작스러운 프로그레시브 딜 전환과 입찰가격 유출 의혹입니다. 지난 8월 예비입찰에서 흥국생명은 8000억원 후반, 중국계 사모펀드(PEF) 힐하우스는 9000억원대 중반, 한화생명은 약 1조원을 제시했습니다. 이후 매각 주관사 측이 '프로그래시브 딜로 전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혀왔고, 흥국생명은 약속을 믿고 본입찰에서 경쟁사보다 높은 1조500억원을 제시했습니다. 한화생명과 힐하우스는 본입찰에서도 9000억원대 가격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매각 측에서 돌연 딜 방식을 프로그레시브 딜로 전환하면서 힐하우스가 매각가를 1조1000억원으로 수정했고, 결국 우선협상대상자로 최종 선정됐습니다. '프로그레시브 딜'은 입찰 과정에서 가격·조건을 한 번에 확정하지 않고, 여러 단계에 걸쳐 점진적으로 좁혀가는 방식입니다.
 
흥국생명은 "매각 측이 프로그레시브 딜로 전환하면서 매각 주관사 모건스탠리 관계자가 흥국생명의 매각가 정보를 힐하우스 측에 전달해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할 것을 제안했다"며 "명백히 위계 또는 기타 방법으로 이번 입찰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입찰 방해 행위이자 자본시장 공정성과 신뢰성을 침해한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힐하우스와 모건스탠리·골드만삭스 모두 입찰 과정을 공정하게 진행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향후 법적 공방은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금융권 매각 소송전 중 이례적 쟁점
 
흥국생명과 이지스자산운용의 소송전은 과거 금융권 M&A 관련 분쟁과 비교해 매우 이례적인 쟁점을 담고 있습니다. 매도인의 광범위한 재량권과 입찰 절차적 불공정성을 놓고 벌어지는 소송인 만큼 국내 M&A 시장에 투명한 딜(거래)에 관한 새로운 기준점을 도출할 수 있다는 시각이 더해집니다.
 
과거 금융권의 대형 소송들은 주로 국가 책임이나 경쟁 제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 소송은 론스타가 한국 정부의 매각 승인 지연으로 손해를 봤다며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46억7950만달러(약 6조8000억원) 규모 배상을 요구했던 사건입니다. 투자자와 국가 간 소송(ISDS) 성격의 강한 소송으로 지난달 한국 정부가 최종 승소해 배상금 0원에 마무리됐습니다. 론스타 사태는 한국 금융 역사에 외국 투기 자본의 유입 및 규제 당국의 책임 문제, 그리고 국제 투자 분쟁 대응 역량 강화라는 큰 숙제를 남긴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통화 스와프 담함 소송은 한국씨티은행, JP모건 등 외국계 은행들이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처분에 불복한 행정소송입니다. 은행들은 '구두 합의에 그쳐 경쟁입찰이 아니었다'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은 "구두 합의라도 입찰이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부당한 공동행위를 규제해야 한다"며 공정위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는 경쟁입찰의 형식을 넘어 실질적 경쟁성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공정거래법 원칙을 확립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반면 흥국생명은 업무상 배임, 공정 입찰 방해, 손해배상 및 가처분 신청 등을 통해 절차적 불공정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공정거래법 위반이나 국가 상대 국제 소송의 성격을 넘어, 최고가를 제시한 입찰 참여자 권리와 매도인의 상대방 선택 자유가 첨예하게 충돌하며 입찰 투명성 의무를 얼마나 훼손했는지 다투게 됩니다. 
 
프로그레시브 딜 전환 법적 구속력 입증 관건
 
흥국생명이 이지스자산운용 매각 절차적 불공정성을 주장하며 소송에 나섰지만, M&A 시장 특수성과 법원 판단 기준 때문에 이를 입증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제기됩니다. 소송의 향방도 매각 측이 '프로그레시브 딜 전환에 법적 구속력 있는 약속'을 했는지 여부를 입증하는 데 달렸다고 분석됩니다.
 
흥국생명은 최고가를 제시했음에도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되지 못한 배경엔 매도 측의 업무상 배임 및 공정 입찰 방해 행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M&A 시장에서 매도인은 매각 성공을 위해 최종 매수자를 선정하는 데 광범위한 재량권을 가진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법원은 통상 가격만이 매수자 선정의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실제 매도인은 매각 대금 외에도 자금 조달의 확실성, 계약 이행 능력, 대금 완납 시기, 향후 경영 계획 안정성 등 비가격적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흥국생명은 매도인 재량권 행사가 아닌, 업무상 배임이나 계약 조건 위반에 해당하는 불법적인 행위였음을 입증해야 하는 어려운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더욱이 법정 다툼의 핵심은 매각 주관사가 '프로그레시브 딜로 전환하지 않겠다'는 말을 흥국생명이 믿고 1조500억원을 제시한 것에 법적 구속력이 있었는지 여부입니다.
 
원칙적으로 계약은 당사자 간의 자유로운 의사 합치에 따라 체결되며 매도인은 언제든지 특정 인수 후보자와의 협상을 중단할 자유를 가집니다. 흥국생명은 단순 협상 과정에서의 발언이나 M&A 관행을 벗어나 프로그레시브 딜 전환에 대해 법적 구속력이 있는 약속을 증거로 제시해야 합니다.
 
금융권 M&A 경험을 가진 IB업계 관계자는 "소송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 매각 절차에 대한 불합리함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항상 있어왔다"면서 "흥국생명의 억울한 입장은 이해하지만, 실질적으로 매도인의 재량권을 뒤집을 만한 불법행위를 법정에서 입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결국 흥국생명이 매각 측의 가격 정보 유출 또는 딜 방식 번복 행위를 입증할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는 게 관건으로 보입니다. 
 
신수정 기자 newcrystal@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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