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주한 파나마대사관이 직장 내 괴롭힘을 언론에 제보한 한국인 직원을 해고한 건 부당하다는 노동위원회 판정이 나왔습니다. 대사관 측은 '외교관 면책특권'을 내세워 해당 사건엔 노동위가 개입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계속된 대사관 측의 면책특권 주장으로 노동청의 직장 내 괴롭힘 조사는 지연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1월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주한대사 신임장 제정식. 왼쪽부터 디에고 마누엘 비야누에바 마르티넬리 주한 파나마 대사, 최상목 전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조태열 전 외교부 장관. (사진=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7일 <뉴스토마토>가 확보한 서울지방노동위원회 판정문에 따르면, 서울지노위는 지난해 12월2일 주한 파나마대사관 직원 A씨가 제기한 부당한 대기발령 및 부당해고 구제신청에서 부당해고를 인정했습니다.
앞서 A씨는 12년 넘게 주한 파나마대사관에서 행정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2월 대사관 측은 돌연 A씨를 1층 안내데스크 책상으로 보내더니 컴퓨터도 없이 일하라고 통보했습니다. 주어진 업무는 지하주차장에 방치된 서류상자 수십개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상자엔 대사관이 이사를 다니며 정리하지 않았던 10~20년 전 문서들이 담겼습니다. 정리할 땐 컴퓨터는 물론 휴대전화도 쓰지 말고 모두 수기로 목록을 작성하라는 지시까지 있었습니다. 이른바 '면벽 근무'를 강요한 겁니다.
A씨는 이런 지시가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신청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한 보복성 조치라고 의심했습니다. A씨는 4개월여 전인 2024년 10월,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 시기에 맞춰 이듬해 3월부터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을 신청할 계획이 있다는 걸 상부에 전달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A씨는 디에고 마누엘 비야누에바 마르티넬리 주한 파나마 대사 등을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로 지목, 서울지방노동청에 신고했습니다. 아울러 언론에도 이를 제보했습니다.
그러자 대사관은 적반하장이었습니다. 오히려 A씨가 근로계약 및 서약상 비밀유지 조항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내렸습니다. 특히 방송 보도 화면에 내부 문서와 A씨 책상 등 대사관 내부가 송출된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대사관은 지난해 3월부터 6개월가량에 걸쳐 대기발령을 5차례 연장한 끝에 그해 9월 A씨에게 해고를 통보했습니다. 이에 A씨는 부당한 대기발령 및 부당해고라며 곧바로 서울지노위에 구제신청을 제기했습니다.
면책특권 뒤에 숨은 대사관…노동청 조사, 1년째 답보
서울지노위는 결국 A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서울지노위는 A씨가 비밀유지 의무를 위반했다면서도 해고라는 가장 무거운 벌을 내린 것은 지나치다고 판단했습니다. 부당해고를 인정한 겁니다.
서울지노위는 "비밀유지가 중요한 대사관이라는 근무장소 등을 고려하면 A씨가 부당한 업무지시에 항의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더라도 무단으로 외부 언론사에 내부 영상 및 문서 등을 촬영해 제공한 것은 정당한 징계사유에 해당한다"라면서도 "(A씨 행위가) 고용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서울지노위는 보도된 내부 문건과 내부 공간이 중대한 비밀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서울지노위는 "A씨가 제공한 대사관 촬영 영상은 주차장과 책상으로 대사관 내부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비밀공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A씨가 촬영해 제공한 문서는 통상 문서 보관 장소가 아닌 외부로 연결되는 주차장에 보관돼 있었고 폐기가 예정된 문서였다"라고도 했습니다. 다만 서울지노위는 직장내 괴롭힘 여부를 판단하진 않았습니다. 이에 직장내 괴롭힘 신고자에 대한 불이익 처분이라는 A씨 측 주장에 대한 판단도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대사관이 면책특권을 주장했지만, 서울지노위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사관 측은 "노동위원회의 구제명령은 행정 행위로 독립한 외국국가를 상대로 할 수 없으므로 노동위원회에 이 사건 구제신청에 대한 심판권이 없다"며 "노동위원회가 구제명령을 하더라도 비엔나협약에 따라 강제집행이 불가능해 구제신청의 내용을 실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국제법과 국제관례상 외국대사관은 치외법권 지역이라 우리나라 사법권이 미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외국의 주권적 활동에 부당한 간섭이 될 우려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우리 사법권이 행사될 수 있습니다. 아울러 A씨 근로계약서엔 '한국의 노동법을 따른다는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서울지노위도 대사관 측 주장을 기각하며 "이 사건 당사자 간 근로계약 체결이 주권적 활동에 속하는 것이거나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재판권의 행사가 외국의 주권적 활동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 될 우려가 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한편, 이 사건의 출발인 직장 내 괴롭힘 사건 조사는 1년째 답보 중입니다. 대사관이 면책특권을 핑계로 서면만 제출하는 등 조사에 비협조적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A씨를 대리한 정병민 변호사(법무법인 도담)는 "대사관 소속 한국인 직원들의 임금체불, 폐쇄회로TV(CCTV) 감시 등 노동 문제를 지적받았던 주한 파나마대사관이 직장 내 괴롭힘 신고자를 해고하고 면책 특권 뒤에 숨어있다"며 "우리 사법권 및 재판관할권에 대한 대법원 판례가 명확한 만큼 노동청은 적극적 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 변호사는 "대사관은 신고자와의 근로계약서를 체결하면서 한국법을 따른다고 명시한 만큼 노동위 판정을 수용하고 신고자를 즉시 원직복직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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