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휴양지를 상상하며 그려봤던 태평양 작은 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이 산산이 부서지는 요즘입니다.
바로 세금을 피해 도망온 기업들이 몰려 있는 '조세피난처' 때문입니다.
조세피난처는 이름 그대로 세금을 피할 수 있는 곳인데요. 작은 섬나라들이 주로 이런 피난처로 꼽힙니다. 얼마나 세금부담이 적으면 해외에서는 세금천국(Tax Haven, Tax Paradise) 라고 부른답니다.
외국인 유치를 위해 세금이 거의 없다시피 운영하고 있는 섬나라들과 자국에서의 높은 세금을 피하고자 하는 기업이나 부자들의 이해관계가 들어맞아서 생긴 독특한 명칭이죠.
뭐 세금을 덜 내겠다고 해외에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냐고 하시겠지만 문제는 이들 기업들이 실제로 법인이나 공장을 설립한 것이 아니라 서류상의 회사만 만들어 놓고 소위 돈세탁을 통해 자국에서 내야할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들 섬나라는 개별회사나 개인의 금융정보를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에 거액의 자금이 몰려 있어도 알 길이 없다는 것이죠. 요즘 유행하는 '지하경제'의 글로벌 버전입니다.
이들 조세피난처를 통한 글로벌 지하경제는 그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세계적인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2010년말 기준으로 최소 21조 달러의 금융자산이 조세피난처에 몰려 있는 것으로 추산했구요. 이들 자산에 최소 3%의 연간 이자와 30%의 세금만 부과한다고 하더라도 세계적으로 2000억달러가 넘는 세수입이 발생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추산된 금액규모를 보시면 눈치채시겠지만 이들 조세피난처에 몰려 있는 기업들의 수를 헤아려보면 깜짝 놀랄 기록들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서류상의 회사, '페이퍼 컴퍼니'(paper company)여서 그런지 작은 섬나라에 수백, 수천개의 기업이 몰려 있어도 섬이 가라앉거나 하는 일은 없다고 하네요.
실제로 해양스포츠의 천국이자 세계적인 휴양지로도 유명한 카리브해의 영국령 '케이먼 군도'에는 세계 각국의 기업 1만8000곳이 들어선 빌딩이 있다는데요. 이 빌딩의 높이는 고작 5층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1개층에 평균 3600개의 기업이 들어차 있지만 빌딩이 무너질 일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업들도 이들 조세피난처를 적잖이 활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말레이시아 사바주, 보르네오섬 북부해안 어귀에 제주도의 1/20 크기에 작은 섬 '라부안'은 고무와 과실류가 주산지인데도 1000여개의 한국기업이 4000여개의 현지법인과 지사를 설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고무나 과일을 생산하는 기업은 아닙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들 세금피난민들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들리네요.
미국의 기자단체 국제탐사보도협회라는 곳이 조세피난처 중 한 곳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차려진 기업과 개인들의 비밀계좌정보가 담긴 컴퓨터 파일 250만개를 손에 넣었다는 것인데요.
곧 명단을 싸그리 공개하겠다고 나서서 피난민들의 신상이 네티즌들에게 털릴 날도 머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여기에 각국에서 조세피난처에 들이데는 돋보기가 현미경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는 점도 이들에겐 우울한 소식입니다.
국가간 금융조세정보협력이 강화되고 있는 것인데요. 우리 정부도 최근 스위스와의 협정체결로 스위스 비밀금고의 문을 연데 이어 버진아일랜드 등 조세피난처와의 정보교환협정 발효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세계경제가 어려워진 덕에 세금을 조금이라도 더 걷어보려는 각국의 노력이 세금 피난민들의 지하경제를 서서히 수면위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죠.
섬나라의 종이회사들이 문닫는 날을 흥미롭게 지켜봐야겠습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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