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 김승연 한화 그룹회장과 구자원 LIG그룹 회장이 나란히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지난 11일 석방되면서 재벌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잣대가 완화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김 회장의 경우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합의5부(재판장 김기정)가 집행유예 참작사유로 피해액을 보전한 점, 경제건설에 기여한 공로가 있는 점, 건강상태가 악화된 점 등을 예시하면서 파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같은 참작사유는 과거 사법부가 ‘재벌 봐주기’ 판결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당시 판결문에 유행어처럼 쓰이던 것들이다.
이번에 김 회장 등이 받은 선고의 양형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과거 재벌들이 기소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법원의 양형과 같다.
2009년 ‘삼성특검’을 받고 기소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불법 비자금 조성과 횡령 등의 혐의로 2007년 기소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수백억원의 회삿돈 횡령·배임 혐의로 2011년 구속 기소된 담철곤 오리온 회장 등이 모두 하급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씩 받고 풀려났다.
재판을 앞두고 있는 여러 재벌기업 역시 이런 기류를 감지하고 매우 고무됐지만 표정관리에 한창이다.
“사법부의 잣대가 과거로 후퇴했다”는 진단에 대해서는 법조계의 분석이 엇갈리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박주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사무차장은 “재벌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잣대가 내려갔다”고 분석했다.
박 차장은 “사법부의 ‘재벌 봐주기’판결에 국민적 질타가 강해지고 2012년부터 경제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커지면서 최근까지 재벌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엄한 기조를 이어온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경제민주화 대신 성장과 고용증진이 화두로 떠오르자 사법부의 잣대는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며 이번 판결이 그의 전형적인 예”라고 평가했다.
박 차장은 또 “이번 판결을 개별적인 하나의 판결로 치부하기에는 다른 재벌 사건들과 구별되어 집행유예를 참작할 만한 특징이 없고 재판부 스스로도 판결문에서 과거 ‘재벌 봐주기’ 판결에서 채택했던 사유와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전형적인 ‘재벌 봐주기’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경제학 박사로 기업 형사사건에 능한 오영중 변호사는 “섣부른 판단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사법부의 잣대가 내려갔다는 지적에 동감하며 또한 우려한다”고 말했다.
그는 “김 회장과 구 회장의 판결문을 보면 이들이 피해를 보전했다는 점이 집행유예 선고의 주요 참작사유로 보이는데 개인이 아닌 재벌총수가 기업에서 부당하게 빼낸 돈을 다시 돌려줬다고 해서, 구속 기소돼 실형을 받고 나서야 피해자들에게 공탁했다고 해서 감형해 석방하는 것은 사법부가 오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제발전에 공헌했다는 참작사유에 대해서도 오 변호사는 “재벌총수는 공헌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열매를 가져가고 그 이상의 것을 누리고 있다”며 “이를 사법부가 양형 감경사유로 참작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일반 근로자는 매년 2000~2400명씩 산업현장에서 숨지고 있다”며 “같은 논리라면 목숨을 걸고 경제발전에 공헌하고 있는 근로자 역시 죄를 지었을 때 경제발전의 공헌도를 참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높아진 재벌사건에 대한 ‘사법 잣대’가 내려갔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견해도 많다.
노영희 대한변협 대변인은 개인적 소견임을 전제하면서 “이번 사건으로 종전의 엄한 양형기준을 적용하던 법원이 태도를 바꾼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재벌사건을 종전과 같이 경제적 논리로만 봐서는 안 되고 법적으로 엄하게 봐야 한다는 하급심과 그렇게 하기는 아직 시기상조로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함께 판단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입장이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노 변호사는 “김 회장의 경우 구속집행정지로 병원에 있었지만 2012년 법정 구속된 뒤 집행유예를 받을 때까지 2년 가까이 사실상 수감 생활을 한 것이 고려된 것으로 생각된다”며 “재벌사건을 엄정 처벌한다는 사법부의 종전 태도는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김영희 경제개혁연대 부소장(변호사)도 “이번 김 회장 등에 대한 판결은 경영권 보호, 다수의 피해자 양산 등 가중요소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불완전한 판결”이라면서도 “사법부가 잣대를 낮췄다고 볼 수는 없다”고 분석했다.
그는 “사법부가 ‘고무줄 양형’. ‘화이트컬러 범죄 엄단’이라는 국민적 요구를 받아들여 양형위원회를 구성하고 양형기준을 강화하고 있다”며 “이번 판결로 그런 사법부의 노력이 완전히 무위로 돌아갔다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김 부소장은 또 “이후의 재벌 관련 사건들이 남아있지만 각 재판부가 양형기준을 완전히 무시할 것이라고는 전망하기 어렵다”며 “사회 흐름상 경제민주화와 사법민주화의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법원 관계자는 “김 회장의 사건은 배임액 산정이 잘못됐다는 법리적인 문제점이 있었고 구 회장도 범죄 가담 정도가 미미했다는 특성이 있었다. 특히 구 회장 일가에 대해서는 아들이 법정구속되지 않았느냐”며 “이번 판결만으로 법원의 잣대가 바뀌었다고 볼 수 없다. 법원의 양형기준은 엄격하다”고 강조했다.
또 “경제민주화 바람이 잦아들자 정권의 입맛에 맞게 재벌들을 풀어주고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횡령·배임 양형은 2009년에 상향조정됐고 김 회장이 법정구속된 것은 이명박 정권 당시인 2012년 8월”이라며 “사법부가 정권에 따라 재벌들에 대한 양형을 달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일축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모습(사진=뉴스토마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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