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미국 캘리포니아 서부 해안에 위치한 인구 29만여명의 소도시 스톡턴(Stockton)시가 지난 2012년 미국 정부에 파산을 신청했다.
아름다운 해안과 풍광을 가지고 있던 스톡턴시는 1990년대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호황을 누렸다. 이에 시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선착장과 스포츠·레저시설, 초호화 펜션 등을 지었으며 시 공무원들에게는 미국 최고 수준의 의료지원과 연금을 제공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미국 경제의 거품이 빠지고 글로벌 경제위기가 시작되면서 스톡턴 시는 위기를 맞았다. 관광산업이 부진에 빠졌고 실업자가 넘쳤으며 시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세수도 감소했다. 결국 2010년 이후 재정적자는 약 1억달러(약 1000억원)에 육박했다. 시의 올해 회계보고서를 보면 예상 적자만 무려 4000만달러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스톡턴(Stockton) 시 해안(사진=스톡턴 시 홈페이지)
무능한 시정 탓에 스톡턴 시는 미국 지방자치단체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을 겪었다. 그러나 스톡턴 시 사례는 지방자치제도 스무돌을 맞은 우리에게 더는 남 일이 아니다.
◇재정여건 고려하지 않는 지방선거..지자체 재정위기의 진짜 원인
올해 지방선거에서 주요 지방자단체 후보들의 공약을 보면 재정관련 공약은 안전과 생활경제 공약에 밀려 후보와 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재정 건전성을 높이거나 지역의 재정여건을 따져 공약을 추진하기보다 선심성·전시성 공약에만 치중하고 있다.
우선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등은 지난 4월 세월호 침몰 사고 후 국민의 관심이 안전체계 강화에 쏠리자 올해 지방선거의 초점을 온통 안전관리에 맞췄다. 대신 지자체 재정 건전성 강화에 대해서는 과거 지방선거 때 외치던 구호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28일 각 당의 지방선거 정책공약집을 보면, 새누리당은 ▲안전하고 든든한 나라 ▲골고루 잘살고 활력 넘치는 지역 ▲꿈과 희망이 샘솟는 신바람 대한민국 등을 3대 정책으로 내세웠지만 지자체의 재정 건전성 강화는 안전·복지체계 확충보다 훨씬 뒤에 뒀다.
새정치연합은 중산층을 위한 안전과 보육, 취업대책 등 10개 부문에서 정책공약을 내놨지만 재정공약은 가장 나중인 10번째에 위치하고, 그나마도 '국가의 사무와 재정권한을 과감하게 지방에 이양하고 자치권을 확대하겠다'는 한줄에 그쳤다.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은 이번 선거 때 내놓은 정책을 실현하려면 4년간 각 5조5000억원, 27조1000억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했으면서도 각 당의 재정 확보방안은 너무나 터무니없다. 정당의 지방선거 공약이 이 정도니 지자체 후보들의 공약은 말할 것도 없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새누리당 정몽준 후보(사진 왼쪽)와 새정치민주연합 박원순 후보(사진 오른쪽)(사진=각 후보 홈페이지)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새누리당 정몽준 후보는 ▲신재생에너지 확대보급 ▲동부간선도로 일부 지하화 ▲소형 임대주택 공급 확대 ▲창동 차량기지 부지에 공항터미널과 복합단지 조성 ▲모든 지하철역에 에스컬레이터·엘리베이터 설치 ▲청소년 리더 4000명 양성 등을 약속했지만 이에 대한 재정 확보방안과 서울시 부채해결에는 별도의 언급이 없었다.
15개 분야 60대 공약을 내건 새정치연합 박원순 후보는 서울시 재정여건을 고려한 공약 이행방안을 비교적 자세히 밝혔지만, 서울시의 재정난 해결책은 '미매각 및 유휴자산 매각과 수익성 개선을 통한 채무감축 지속 추진'으로 짧게만 제시해 구체성이 떨어졌다.
이들의 공약을 분석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정 후보의 세부과제와 재정확보 방안은 구체성이 떨어지고 실천 가능성이 약하다"며 "박 후보의 안심주택 8만호, 소형주택 20만호 공급은 서울시 재정이 부족해 임기 내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경실련은 특히 정몽준 후보의 차량 창동기지 재개발 건에 대해서는 "공항터미널과 복합단지 조성 공약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투자 증대가 민간투자 유치에 의존하고 있어 실현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으며 재정부담을 가중시킬 우려가 크다"고 강조했다.
부산에 20만개 일자리를 만들고 가덕도에 동남권 신공항을 유치하겠다는 새누리당 서병수 부산시장 후보와 부산을 동북아시아 해양경제수도와 복지자립도시로 키우겠다는 새정치연합 오거돈 후보의 공약도 정책구상만 거창할 뿐 재정확보 방안은 찾을 수 없었다.
강원도를 창조경제단지로 육성하고 권역별 특성화 사업을 벌이겠다는 새누리당 최흥집 강원도지사 후보, 은퇴자와 청년을 위한 일자리 3000개를 만들고 강원도 출신 고등학생에 연간 20만원씩 대학 등록금을 지원한다는 새정치연합 최문순 후보의 공약은 전국 광역자치단체 중 재정자립도 꼴찌인 강원도의 재정여건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옥남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치실장은 "지방선거 후보자의 주요 공약을 분석한 결과, 일부 공약들은 이행기간과 재원조달 방안 등이 구체적이지 않고 유권자의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 공약, 예산규모나 확보방안·이행기간을 알 수 없는 사업 등이 많았다"고 말했다.
◇2014년 6·4 지방선거 주요 정당별 정책과 공약비교(자료=바른사회시민회의)
◇지방선거 단골메뉴 '선심성 공약'..왜 사라지지 않나?
사실 지자체 재정위기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방선거 후보자들 역시 표심을 잡겠다고 내놓은 묻지마 공약이 언젠가는 자신들의 발목을 붙잡을 수 있고 선심성·전시성 사업들이 지자체의 재정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방선거 때면 앞뒤 안 가리는 공약들이 튀어나오는 이유가 뭘까. 지난 2010년 지방선거 때 경북지역 기초의회에 도전한 경험이 있는 A씨는 지방선거에 대한 정치권과 시민의 관심이 대선·총선보다 낮다는 점을 첫번째 이유로 꼽았다.
올해 지방선거만 봐도 4월16일 세월호 침몰 후 여론이 사고수습에만 쏠리자 각 정당은 지방선거 준비 일정을 최대한 늦추며 정책공약, 후보자별 공약 발표를 차일피일 미뤘다.
A씨는 이럴수록 가뜩이나 재정과 지역사업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시민들은 후보자의 공약을 꼼꼼히 비교할 시간이 부족해지고, 선거는 정책보다 인물선거, 재정 건전성을 고려한 공약과 공약의 실천 가능성보다 묻지마 선심성 공약에 표를 던진다는 것이다.
◇2013년 기준 전국 광역지방자치단체 재정자립도(단위: %, 자료=통계청)
지방선거 공약을 검증할 전문기관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올해 지방선거에서 17개 광역자치단체장 후보는 61명, 226개 기초자치단체장 후보는 707명으로, 여기에 시·도의회, 구·시·군의회 의원, 교육감 등 기타 후보자들까지 포함하면 총 후보자만 8948명이다.
9000명에 육박하는 후보의 공약을 일일이 검증하고 분석할 전문가가 부족한 데다 작은 시나 군은 시민단체 활동도 적어 공약보다 정당·인물만 보고 '찍는' 사례가 빈번하다.
이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후보자 정책 공청회를 열고 언론이 사전 검증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시민은 납세자로서 지자체의 사업추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므로 직접 정책수립 과정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배인명 서울여자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지자체의 포퓰리즘 예산편성과 집행을 시민이 직접 통제·감시하게 하는 기능이 취약하다"며 "주요 사업에 대한 주민투표제 등을 도입하여 주민들의 재정운영에 대한 참여를 확대하는 한편 지자체의 모든 재정정보를 공개해 지자체 간 비교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해 유권자로 지방선거를 치르는 A씨는 "일단 붙고 보자,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선거 공약과 부실한 재정대책은 4년 뒤 지자체 재정위기 부메랑으로 돌아온다"고 경고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