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9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대기업 대표들이 신년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정권 따라 기업들도 춤추고 있다. 모두들 '녹색성장'에 동참하겠다며 팔을 걷어부치더니 어느새 '창조경제'로 방향타를 돌렸다. 실익 여부를 떠나 '찍혀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눈치가 작용한 탓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그린에너지 사업에 투자를 늘렸다가 별 다른 성과 없이 손해만 보고 사업을 접는 사례가 현 정부 들어 줄을 잇고 있다.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MB정부 정책 기조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대기업들이 앞다퉈 태양광과 연료전지 등 그린 비즈니스에 투자했지만 성과없이 발을 빼는 모양새다.
삼성그룹이 지난해 말 삼성SDI의 태양전지사업 철수로 사실상 태양광 사업에서 손을 뗀 데 이어, SK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도 최근 미국 태양광 전지 자회사인 헬리오볼트의 청산 절차를 밟고 있다.
포스코그룹은 앞서 정권교체 직후인 2013년 포스코에너지의 미국 태양광 사업을 철수했다. 삼성은 태양광뿐만 아니라 2009년 출범시킨 LED사업부도 지난해 말 해외조명세트 작업을 포기하는 등 전략 실패를 자인했다.
수년간 투자한 사업을 철수하게 되면서 이들 기업들이 입은 손실도 적지 않다. 포스코에너지는 태양광사업 철수로 과거 4년간 투입한 137억원을 손상차손으로 반영했다. 4년이라는 시간과 함께 137억원이라는 돈을 탕진한 셈이다.
SK이노베이션은 2011년 헬리오볼트를 5000만달러에 인수하는 등 총 7600만달러를 투자했지만 결국 청산하게 되면서 운영자금으로 빌려준 139억원을 비롯해 600억원의 추가손실이 불가피해졌다.
사업 철회에 따른 손해로 법적분쟁까지 진행된 사례도 있다.
범현대가 일원인 현대중공업과 KCC는 2008년 KAM이라는 태양광업체를 합작으로 설립했으나 시황 악화와 실적 추락으로 결국 갈라섰다. 이 과정에서 현대중공업이 자본잠식상태인 KAM 보유지분을 소각하면서 먼저 발을 뺐고, 부실을 혼자 떠안게 된 KCC가 손해를 보상하라며 소송을 제기, 서로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대통령이 손짓하니 너도나도 그린에너지
기업들의 그린에너지 사업 포기와 이에 따른 손해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부터 예고됐다. 2008년 9월11일 청와대에 주요 대기업 총수와 대표들이 모인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날 행사는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그린에너지 발전전략 보고회'였다.
삼성전자에서는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이기태 부회장이 참석했지만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을 비롯해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이구택 포스코그룹 회장,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이수영 동양제철화학(現 OCI)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 평소 함께 모이기 힘든 귀하신 몸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당시 지식경제부가 그린에너지 발전전략을 보고하고, 재계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태양광과 풍력, 연료전지, 전기자동차 등 그린에너지 사업에 총 8조원 규모의 투자를 쏟아붓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총수들과 대통령이 직접 한자리에 모인 이유였다.
기업들이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화답을 목적으로 꼼꼼한 사업 검토 없이 발을 들이거나 거액의 투자를 결정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것도 다수의 기업들이 유사한 사업에 동시다발적으로 뛰어든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무리수였다.
한화케미칼이나 OCI가 태양광 수직계열화를 완성하며 악화된 업황에도 차근차근 호황기를 대비한 것과는 진출 초기부터 대조되는 행보였던 터라 결국 시류에 편승해 투자한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실패를 맛봐야만 했다.
SK이노베이션의 헬리오볼트 청산 역시 에너지 경쟁사들의 태양광사업 진출 시류에 편승한 '섣부른 결정'의 결과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삼성과 같이 그룹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사업이 추진됐지만 실패한 사례도 있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2010년 5월 그룹의 미래를 결정할 '5대 신수종 사업'을 발표하면서 LED사업과 태양광, 전기차배터리 등 그린에너지 관련 사업을 대거 포함시켰지만 결과는 좋지 않다.
삼성의 태양광사업을 주도했던 삼성SDI가 태양전지 생산에 나섰으나 공급과잉에 빠지자 2012년 생산을 전격 중단키로 했고, 차선책으로 선택한 박막형 태양전지 연구개발(R&D) 투자도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삼성정밀화학도 지난해부터 폴리실리콘 사업을 포기했으며, 제일모직 역시 태양광발전소 설치·운영사업을 전면 보류 중이다. 삼성그룹이 태양전지 사업에서만 2015년 3조5000억원, 2020년 10조원의 매출을 거두겠다고 밝힌 야심찬 목표는 수치 제시에만 그치게 됐다.
태양광 등 그린에너지 사업 실패의 이면에 저유가 등 업황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깔려 있지만, 무리한 투자를 요구하는 정부 정책과 여기에 편승해 체계적인 고민과 준비 없이 우후죽순 시장에 뛰어든 기업들의 과오도 무시할 수 없다는 평가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9월 15일 오후 대구 북구 창조경제단지 예정부지를 방문하고 있다.(사진=청와대)
◇창조경제 열풍..또 다른 실패 우려
박근혜 정부 들어 '창조경제' 기조에 부응하기 위한 기업들의 투자 계획이 쏟아지면서 또 다른 우려를 낳고 있다. MB정부의 녹색성장과 기업들의 그린에너지 사업의 실패 사례를 답습할 수 있다는 경고다.
지난해 9월 정부가 전국에 17곳의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열고 창조경제 확산을 위한 구심점으로 정착시키겠다고 발표하자, 주요 대기업들은 앞다퉈 그 손발이 되어 줄 것임을 자청했다.
가장 빠르게 움직인 삼성그룹은 정책 발표 2주 뒤인 9월15일 대구에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출범시켰고, 10월에는 SK그룹이 나섰다. SK는 대전에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세종시에는 창조마을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SK그룹 주력사업인 ICT와 결합한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11월에는 효성그룹이 전북에 탄소섬유 산업을 기반으로 한 창조경제혁신센터를 개설했다. 재계 서열 20위권의 효성그룹이 세 번째로 나선 것은 다소 의외였지만 조석래 회장 등이 처한 곤경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효성의 발빠른 참여는 앞선 SK그룹 사례와 연결되면서 총수 리스크 해소를 위한 정부향 러브콜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구속수감 중인 최태원 회장이나 재판 중인 조석래 회장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이번 투자에도 담겼을 것이라는 풀이였다.
정부의 강력한 요구에 남아 있는 창조경제혁신센터에도 주요 기업들이 이름을 하나둘 올리기 시작했다. 현대차그룹은 광주(수소자동차)에, 롯데그룹은 부산(유통관광)에, LG그룹은 충북(전자정보·바이오)에 각각 역할 분담이 예정됐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 19일에 이어 22일에도 직접 광주를 찾아 창조경제혁신센터 준비상황을 점검했다. 정 회장이 광주를 찾은 것은 2008년 3월 이명박 대통령의 기아차공장 방문 때 동행한 이후 지난 19일이 처음이다.
이 같은 일련의 기업들 움직임에 대해 김한기 경실련 경제정책국장은 "창조경제의 의미조차 여전히 모호한 상황에서 대기업들에 대한 특혜가 되거나 반강제적인 참여가 될 수 있는 정책"이라며 "그 결과 역시 경제부흥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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