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이 진실을 이겼으나 거짓은 반드시 그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1991년 12월20일 이른바 '유서 대필' 누명을 쓴 강기훈씨에 대한 1심 선고가 있은 직후 변호인단은 이렇게 절규했다.
당시 1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법합의 25부(재판장 노원욱)는 자살방조죄와 국가보안법위반(이적단체가입 및 이적표현물 소지) 등 강씨에 대한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특히 쟁점이 됐던 자살방조 부분에 대해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은 감정인인 이 연구소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씨의 경력 및 감정과정과 방법, 법정진술 등을 종합해볼 때 공정하게 이뤄진 것으로 신뢰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렇다할 증거도 없고 공소사실도 특정되지 않은 검찰의 공소장을 그대로 판결문에 옮긴 것이다.
재판부는 변호인측 감정증인인 일본인 필적감정가 오니시요시오의 필적 감정에 대해서는 감정인이 한글을 전혀 모르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강씨의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1991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외치며 분신자살하자, 검찰이 김씨의 동료였던 강씨가 유서를 대신 쓰고 김씨의 자살을 부추겼다고 기소한 사건이다.
당시는 6공화국으로서 군사정권의 끝물이었다. 임기 3년 만에 통치력 부재 및 각종 비리로 레임덕을 겪고 있던 6공 정권은 국면전환이 필요했다. 소위 말해 '쇼킹한 사건'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돈 것이 분신 루머다. 운동권학생 지도부가 "다음은 너"라고 지목하면 꼼짝없이 분신을 해야 했고, 그 뒤에 남파된 북한 세력이 있다는 게 줄기다.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그 전형적인 사건이다.
김씨가 분신한 이후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미리 써놓은 시나리오에 사건을 우겨넣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강신욱 부장판사가 수사를 지휘했고 신상규 검사가 주임검사를 맡았다. 수사팀에는 남기춘, 곽상도 검사 등 현재까지도 실세를 누리는 검사들이 끼어 있었다. 법무부장관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정부와 검찰이 '유서대필 조작사건'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당시 검찰의 정기인사를 봐도 알 수 있다. 강 부장검사는 근무연한과 기수 등을 고려할 때 지방 지청장으로 가는 게 순서였다. 그러나 서울지검 형사1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계속 맡았다. 강 부장검사와 함께 수사했던 신상규, 송명석 등 강력부 검사들도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로 함께 배치돼 재판을 책임지도록 했다. 유죄를 받아내라는 암묵적 지시였다.
검찰이 사건과 관련해 확보한 유일한 직접증거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결과 뿐이었다. 당시 필적감정을 맡았던 김형영씨는 김씨와 강씨의 필체가 같다는 감정결과를 검찰과 법원에 제출했다.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공소유지가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나왔었다.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대필했는지에 대한 수사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은 강씨를 유서 대필에 의한 자살방조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공소장에는 대필 시점을 "91년 4월27일경 부터 5월8일까지 어느 날 서울 어느 곳에서"라고 적시했다.
오죽하면 강 부장검사도 기소 후 "범죄일시와 장소도 밝혀내지 못한 채 공소장을 작성하고, 이미 보도된 내용으로 발표문을 쓰려니 부끄러워서 사표를 쓰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검찰은 그렇게 기소하고도 강씨에게 징역 7년에 자격정지 3년을 구형했다.
김창국 변호사 등 강씨를 위한 변호인단은 "검찰의 공소장에 유서대필의 일시, 장소가 특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 역시 재판 내내 곤혹스러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리가 종결된 뒤 노 부장판사는 "확실한 심증을 형성하지 못했다"며 초조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강씨의 유서대필 혐의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다만 "자살을 만류하지 않고 유서를 대필한 것은 일종의 살인행위로 엄벌에 처해야 하나 유서대필, 경위, 일시, 장소 등이 밝혀지지 않아 중형을 선고할 수 없다"고 양형이유를 밝혔다. 이어 "신이 아닌 인간의 판결임을 이해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 부장판사가 판결문을 읽는 동안 배석판사들은 얼굴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씨에 대한 항소심 재판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유일한 직접증거인 필적조사를 담당한 김씨가 감정과 관련해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그 전인 1980년에도 허위감정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었다.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감정결과도 심각하게 신빙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구속 중에도 항소심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유서는 강씨의 필적이 맞다"고 주장했다.
당시 김씨는 "필적감정결과 유사비율이 70% 이상이면 같은 필적, 45%이하면 다른 필적으로 판단한다"면서 "판단은 오랜 감정경험을 통해 감정도중 마음속으로 계산된 수치에 의존한다고" 밝혔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가 아닌 주관적 요소로 감정했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그러나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임대화)는 1심의 선고를 그대로 유지했다. 김씨 감정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김씨의 구속사건과 이 건은 별개"라며 신빙성을 인정했다.
강씨측이 즉각 상고했으나 당시 박만호 대법관이 주심을 맡으면서 논란이 거셌다. 박 대법관은 1985년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로 재직했는데 그해 11월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사건이 발생했다. 검찰은 대학생 193명 전원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박 대법관은 심사 직전 영장전담판사 9명 전원을 불러 "최대한 검찰의 뜻을 들어주고 정말로 기각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나에게 의견 조정을 구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193명 전원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1992년 9월 박 대법관이 주심을 맡고 당시 김상원 대법관을 맡았던 상고심에서 강씨는 끝내 1심의 징역형이 확정됐으며 만기 복역 후 출소했다.
이후 강씨는 경찰청이 2004년 11월 발족한 과거진상조사위원회 조사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검찰의 기소가 증거법칙 위반이라는 결론이 나오자 2008년 5월 서울고법에 자살방조 부분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으며, 결국 이번 대법원의 선고로 무려 24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하지만 재심결정과 재심, 재심의 상고심까지 진행되면서 어떤 법원도 강씨에 대한 유감조차 표하지 않았다. 1심에서 변호인들이 외친 것처럼 거짓이 결국 그 정체를 드러냈지만 그 얼룩은 남긴 셈이다.
특히 재심개시결정부터 대법원의 확정판결까지 약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해하기 힘든 긴 세월이다. 그러는 동안 강씨는 참혹한 인생을 보내야 했고 최근 얻은 간암으로 이번 대법원의 무죄선고 공판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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