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시장은 신뢰를 먹고 자란다
2015-07-20 06:00:00 2015-07-20 06:00:00
"한국경제의 위기는 신뢰의 부족(Trust Deficit)에서 비롯됐다. 투자자와 국제사회에 믿음을 주지 못하는 기업이나 국가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글로벌 시장경제의 논리를 한국은 경시했다."
 
'트러스트(Trust)', '역사의 종언' 등의 저서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가 1997년 한국의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당시 한국사회에 던진 위기진단이다. 코넬대학에서 고전학을 공부하고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쿠야마 교수는 미국무부 정책실과 워싱턴 랜드연구소 선임 연구위원을 거쳐 현재는 버지니아주 조지메이슨대학 교수로 있다.
 
당시 우리 기업들은 오너의 사적인 이해관계나 직관적 판단에 의존하면서 의사결정 과정이나 회계 투명성 등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업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핵심역량 강화에 더욱 노력해야 했으나 돈을 벌지 못하는 그룹 계열사를 지원하느라 여력을 낭비했고 이로 인해 믿고 투자할 만한 기업이라는 신뢰를 주지 못해 해외 자본의 공급이 단절되면서 위기를 촉발했다는 설명이다.
 
코스닥시장의 발전과정을 보더라도 신뢰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알 수 있다. 1990년대말 벤처기업의 자금조달처로써 각광받았던 코스닥시장은 2000년 버블 붕괴시 형성된 투자자들의 뿌리 깊은 불신으로 오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상장된 지 1년도 안 된 기업이 상장폐지되고 연일 작전세력에 의한 주가조작 사건이 터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불과 10개월 만에 지수가 80% 이상 하락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경험했고 이후 코스닥시장은 다시 신뢰를 회복하기까지 긴 시간이 소요됐다.
 
우선 코스닥시장 신뢰하락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부실기업들을 대대적으로 솎아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퇴출효과가 낮은 형식적 기준 대신 질적 검사를 통해 한계기업을 적극적으로 퇴출시키는 '상장적격성 실질검사'를 과감하게 도입했다. 이를 통해 6년 동안 무려 293개의 부실기업들을 퇴출시킴으로써 전체 상장기업의 4분의 1이 넘는 기업이 물갈이 됐다. 또한 코스닥에 따라다녔던 '작전'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금융당국과 검찰, 거래소가 직접 연계해 증권범죄를 수사하는 등 특단의 조치들도 단행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최근 코스닥시장의 체질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횡령은 물론 배임, 불성실공시, 관리종목지정 등 각종 불건전 사례가 현저히 줄었고 코스닥 종목의 주가변동성도 2000년에 비해 4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 체길개선의 효과는 주가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작년 4분기부터 코스닥지수는 주변 이슈에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 '가짜 백수오'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그 영향이 시장 전체로 확산되지 않고 단기간에 그쳤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10년 이상의 노력과 기다림이 필요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업이 앞으로 투자자와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경영투명성(Transoarency)' 확보와 함께 '설명책임(Accountability)'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기업은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경영이나 투자활동 전반에 대해 투자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한다. 투자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하는 기업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매우 가혹하기 때문이다.
 
월가의 투자자들, 특히 연기금과 펀드 등을 중심으로 한 기관투자자들은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투자결정이나 기업경영에 대해서는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전량 매도하거나 책임을 묻는 행동을 보편화하고 있다. 이것의 월가의 법칙(Wallstreet rule)이고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이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신뢰라는 자산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신뢰가 부족한 사회는 정치·경제·사회적 비용을 크게 부담할 수밖에 없고 고신뢰 사회는 그 사회의 전반적 비용을 줄여 기업이나 국가 경쟁력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만난 기업투자전문가에게 가장 좋은 기업을 선택하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 기업의 CEO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보라는 것이었다. 신뢰가 있는 곳에 자본, 거래, 기업이 모인다는 당연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다.
 
김재준 한국거래소 코스닥시장본부장 
 
차현정 기자 ckck@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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