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하는 황소개구리. 사진/바람아시아
영화 ‘암살’과 ‘베테랑’은 두 마리 황소개구리다. 거대한 몸집으로 하천을 활개 치며 다양한 생명을 위협한다. 하천의 어느 곳을 언제 찾든지 두 황소개구리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천엔 오로지 황소개구리만 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두 영화는 우리영화생태계의 다양한 물고기들을 ‘암살’ 하는 ‘베테랑’ 이 되었다.
놀랍게도 두 황소개구리는 수입종이 아니다. 우리하천에서 자라난 토종이다. 우리하천의 다양한 물고기들은 이점을 의아해 한다. 10년 전 ‘스크린쿼터제’ 폐지를 막고자 함께 힘을 모아 싸웠던 전우들이기 때문이다. 본래 우리 하천의 물고기들을 위협한건 주로 할리우드에서 수입된 골격 큰 외래종이었고, 이들로부터 하천을 지켜준 건 스크린쿼터란 울타리였다. 10년전 만 하더라도 거물급 영화 제작자에서 스타배우, 유명감독에 이르기까지 영화계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데 모여 하천의 울타리를 수호했다.
※스크린 쿼터제란 영화관에 연간 한국영화 의무 상영 일을 정해놓는 제도를 말한다.
94년 극장연합회에서 위헌소송을 제기할 때도, 98년 한미(韓美)투자협정이 울타리를 부시려 할 때도, 두 팔 걷고 맨 앞에서 하천을 지켜준 건 ‘토종-황소개구리’들이었다. 2006년 한미FTA의 결과로 스크린쿼터가 반 토막이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외래종과 겨뤄볼 만한 힘센 동료였다. 작은 물고기들은 토종-황소개구리들을 의지했고 황소개구리들은 이들을 지켜줬다. 크고 작은 다양한 생명은 우리 하천의 생태계를 조화롭게 가꿔왔고 이에 힘입어 한국 영화시장은 양과 질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뒀다. 그 열매는 모두에게 돌아갔다.
스크린쿼터폐지 반대시위 중인 '베테랑'의 류승완 감독. 사진/바람아시아
그러나 토종-황소개구리는 더 이상 외래종으로부터 하천을 지켜주는 맏형이 아니다. 여전히 외래종과 맞서는 건 맞지만 도리어 하천의 모든 먹잇감을 독차지 하는 독재자로 군림한다. 정부산하의 한국영화진흥위원회가 공개한 통계자료를 보면 이 이야기가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스크린쿼터란 울타리가 사라질 무렵 한국영화‘왕의 남자’는 불과 313개의 스크린 수로 970만 명을 동원했고, ‘괴물’은 647개의 스크린 수로 109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외래종‘트랜스포머2’와‘트랜스포머3’가 각각 1154개와 1409개에 달하는 스크린 수 확보하며 독식한 것에 비하면 양반이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관객 수를 동원한 한국영화 ‘화려한 휴가(2007)’, ‘좋은 놈·나쁜 놈·이상한 놈(2008)’, ‘해운대(2009)’, ‘아저씨(2010)’, ‘최종병기 활(2011)’이 차지한 스크린 수는 각각 551개, 864, 764개, 501개, 615개다. 결코 많지 않다.
이렇듯 토종-황소개구리들은 외래종에 비해 퍽 양심적이었다. 다른 물고기들 위한 먹잇감을 항상 남겨두었고, 압도적인 스크린 수로 승부를 보기보다는 상영일수를 늘려가며 관객을 모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수익률이 110%넘는 시점부터 스크린 수를 줄인다는 암묵적인 관행도 지켜왔다. 배가 고파도 한 번에 왕창 먹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오래 먹었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작은 물고기들이 입소문을 타고 횡재할 기회도 적지 않았다. ‘왕의 남자’가 대표적이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 공개된 자료를 토대로 만듦. 자료제공/바람아시아
토종-황소개구리들이 외래종의 전철을 밝기 시작한건 2012년부터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도둑들’과 ‘광해’는 각각 1091개, 1001개의 스크린 수를 확보하며 국내 영화로는 처음으로 스크린 수 1000개를 넘겼다. 같은 해 어벤져스가 967개의 스크린 수를 확보했으니 이제는 외래종도 압도할만한 육중한 몸을 지니게 된 것이다. 다음 해‘설국열차’와‘관상’이 1200개에 가까운 스크린 수를 확보하더니 작년에는 화제의 영화 명량이 스크린 1587개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조그만 물고기 300마리가 먹을 량을 혼자 먹은 셈이다. 여러 논란을 일으킨 ‘국제시장’과 ‘연평해전’도 1000개가 넘는 스크린을 손쉽게 확보했다.
올해의 쌍두마차 ‘암살’과 ‘베테랑’은 이젠 자연스럽다는 듯 각각 1519개, 1115개의 스크린을 차지했다. 현재 국내 전체 스크린 2,404개의 60%에 가까운 수치다. 지난 10년간 전체 스크린 수는 약 1.5배, 관객 수는 약 30% 늘어났지만 황소개구리들의 먹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하천 개체 수는 두 배 반이나 늘어났으니 먹이배분상황이 더욱 악화된 것이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 공개된 자료를 토대로 만듦. 자료제공/바람아시아
먹잇감에 해당하는 스크린 수가 아니라 영양소라 할 수 있는 매출액을 보면 소수의 토종-황소개구리가 하천의 생태계를 위협한다는 게 더욱 자명해 진다. 올해 개봉한 영화 중 상위 10개 영화의 매출 점유율은 50%가 넘는다. 나머지 769개의 영화가 그들이 먹고 남긴 것을 나눠먹었다. 최근 십년 영화시장 전체 매출액이 두 배 늘어나는 동안, 황소개구리와 작은 물고기들의 ‘섭식격차’도 더욱 벌어졌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황소개구리가 아니라 ‘공룡개구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먹성이다. DVD, 다운로드 등의 부가시장이 매우 작은 한국영화시장의 특성상 스크린 수를 확보하지 못한 나머지 작은 물고기들은 이빨이 없는 것과 다름없다.
애초에 영화란 예술의 영역이 아니었다. 기술적 호기심에서 발명된 영화의 상업적 가치를 알아본 선구자들이 영화산업을 발전시켰다. 영화는 태생부터 상업영화이자 대중영화다. 그러나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네아스트’ 들이 많아지면서 예술적 기능이 추가된다. 이후 영화는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인간적 가치를 탐구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모색한다. 지나간 역사를 반추하는 망원경으로서, 동시대를 반추하는 거울로서 사회와 호흡해왔고 영화에 기대를 거는 사람도 많아졌다.
한국영화생태계가 소수의 상업영화에 잠식당하는 걸 걱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의 다양성을 유지해야하는 이유는 단지 한국 영화 생태계의 생존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영화가 공존해야하는 까닭은 그저 참신한 컨텐츠와 창의적 기법을 발견해 내기 위한 데 그치지 않는다.
한국영화 생태계에 종의 다양성이 유지된다는 것은 우리사회를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볼 창이 많아짐을 의미한다. 또 쉽게 지나쳐지는 사회의 이면을 응시할 시선이 많아짐을 의미한다. 이로써 우리사회가 획일적 가치로 통일되지 않고 수많은 의견이 서로 충돌하는 건강한 공론의 장으로 거듭남을 뜻한다. 영화가 미디어인 한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적’ 일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 지점도 있다.
침묵의 시선(좌), 다이빙 벨(우) 영화포스터. 사진/바람아시아
세월호를 다룬 ‘다이빙 벨’ 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개봉했음에도 고작 스크린 4개를 확보했고, 인도네시아 군부의 학살을 다룬 침묵의 시선’ 은 국내에서 30개의 스크린을 확보했다. 이마저도 주말과 평일 저녁이 아니다. 그야말로 보고 싶어도 보기 어려운 희귀종이다. 이런 영화들은 관객에게 외면당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기에 투자자들은 돈을 대지 않는다. 그 결과 개체 수는 매년 급감하고 있다. 삶에 비해 턱없이 짧은 러닝타임이나마 망각된 흉터를 직시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황소개구리에 대적할 힘도 없거니와 관객조차 먹이를 주지 않는 작은 물고기들의 생명은 그 어느 때 보다 위태롭다. 그렇게 우리사회와 역사의 어둡고 아픈 곳을 응시할 시선은 사라져왔고 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당신이 찾은 하천엔 황소개구리 울음소리만 울려 퍼진다. 개굴개굴 개구리, 목청도 좋다.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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