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규제'라 하면 정부가 민간 분야에 일정한 규칙을 설정하고 이를 지키도록 강제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규제는 처음에 공익에 기여하기 위하여 도입되지만, 일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입 취지가 퇴색하고 단지 규제를 위한 규제로 남기도 한다. 정부는 우리 경제의 활력 제고를 위해 '손톱 밑 가시 제거', 그림자 규제 철폐 등 규제개혁 추진에 지속적으로 힘쓰고 있다.
이러한 정부 주도의 규제와 달리 증권시장에서는 '자율규제'가 있다. 자율규제란 시장참가자들이 건전한 거래질서 유지를 위하여 자율적으로 규칙을 정하고,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해 스스로 제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의 제재는 일종의 약속 위반에 따른 상호간 신뢰 추락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현재 증권시장의 자율규제는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가 주로 담당하고 있다.
자율이라는 말과 규제라는 말은 일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다수의 참가자가 실시간으로 거래하는 증권시장의 특성, 기술 발전에 따라 복잡하고 고도화된 규제환경 등을 고려할 때 공적 규제에만 의존하는 경우 시의 적절한 대응이 곤란할 수 있다. 이 경우 시장에 대한 이해를 갖춘 시장참가자의 자율규제가 보다 효율적으로 시장질서 유지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자율규제는 시장의 최일선에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불법성이 없더라도 시장의 공정한 운영에 필요한 윤리 수준을 시장참가자에게 요구할 수 있으며, 규제비용도 공적 규제에 비해 절감하는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 증권규제를 위한 국제협력 단체인 IOSCO(국제증권관리위원회기구)에서도 '효율적인 규제모델(Model for Effective Regulation)'이라는 보고서에서 증권시장 자율규제의 이점으로 전문성, 자발성, 투명성, 탄력성 등을 들고 있다. 이렇듯 자율규제를 통해 공적 규제의 공백 우려를 보완하는 '규제 컨소시엄(Regulatory Consortium)'의 구축은 시장 전체의 건전성 및 효율성 제고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율규제는 시장의 신뢰 확보를 통해 궁극적으로 시장의 효율화에 기여하는 것이지만, 규제적 성격에 따라 시장에 부담요소로 작용할 소지도 있다. 시장감시위원회는 '시장친화적 자율규제'를 추진하고 있다. 시장친화적 자율규제는 시장참가자에게 불편을 줄 수 있는 요인들을 최소화하여 시장의 자율적인 흐름을 방해하지 않되, 시장을 왜곡시킬 수 있는 요인들을 사전에 찾아내 이를 방지하는 활동을 말한다.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는 시장친화적 자율규제를 위하여 다양한 불공정거래 예방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사건 등이 예상되는 경우 투자유의사항(Investor Alert)을 시장에 안내하고, 불건전한 주문 행태를 보이는 계좌에 대하여 경고 또는 수탁거부 등의 조치를 통해 불공정거래로 이어지지 않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시장감시와 관련된 규정이나 제도가 변경된 경우, 회원의 위규행위 발생 이전에 미리 예측 가능한 위규행위에 대하여 사전 컨설팅 형식의 계도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작년 말에는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하여 시장감시위원회의 주요업무 중 하나로 '불공정거래의 예방활동'이 명시적으로 도입됐다. 이를 통해 향후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불공정거래를 사후에 적발하던 시스템에서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금융위원회는 최근 '거래소시장 경쟁력 강화방안'을 추진하면서, 그 일환으로 시장감시법인을 설립한다는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미국(NYSE Regulation)이나 일본(JPX Regulation) 등 선진 사례를 참고해 거래소와 분리된 별도기구를 통해 시장감시기능을 전담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시장에서의 이해관계자간 이해상충을 방지하면서 전문적인 시장건전성 기구를 설립하고 활용함으로써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질적 성숙도를 대폭 향상시키고자 하는 고심의 결과로 보인다.
우리 시장에서도 시장감시에 특화된 자율규제기구가 도입되는 경우, 거래소와의 협력을 통하여 자율규제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독립적 운영을 통하여 그 전문성을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를 통해 시장친화적 자율규제의 핵심목표인 '신뢰 제고를 통한 시장 활성화'에 한층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해선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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