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본질은 정경유착이다. 재벌들은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창구로 미르·K스포츠 재단에 900억원에 가까운 거금을 출연했다. 청와대의 압박이 있었다지만, 대가를 바라는 재벌들의 이해도 작용했다. 과거 재벌이 군사정권에 비자금을 조달하고 반대급부를 취한 부정이 연일 지면을 장식했지만, 그 오욕의 역사는 반복됐다. 죄에 대한 온당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신조어도 낳았다. 결국 눈덩이처럼 커진 불만은 ‘재벌개혁’을 외치는 거센 촛불의 물결로 이어졌다. 재벌이 정치권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정경유착 역사를 되짚고 문제 해결점을 찾는다. 재벌이 바로 서야, 국가경제도 제 길을 걸을 수 있다.(편집자)
[뉴스토마토 이재영기자] 대다수 전문가들은 해방 직후 미 군정의 원조물자 배정 및 적산불하 시기를 정경유착의 기원으로 본다. 1945년 9월25일 미 군정은 일본인의 사유재산을 귀속 조치한다. 당시 적산의 규모는 국내 전체 토지의 37.8%, 산업시설의 46.5% 수준이었다. 미 군정은 1947년 2월부터 이를 불하하기 시작했다. 적산은 시장가격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 불하됐다. 적산 기업에 연고가 있는 사람 위주로 불하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연고 없이 로비를 통해 불하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경제인과 정치권력 간의 유착이 원인이었다. 미 군정은 적산 기업 중 15% 정도만 불하하고, 나머지를 1948년 한국 정부에 인계한다. 이승만 정부도 미 군정의 불하 원칙을 승계했으나 정경유착은 미 군정기 못지않았다는 평이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적산은 일제시대의 결과물로 민족 공유재산”이라며 “국가와 국민 전체의 복리를 위해 사용돼야 함에도 재벌이 독식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통틀어 불하된 적산 기업은 2700여개다. 당시 적산 기업을 불하받아 재벌로 성장한 주요 사례로는 소화기린맥주 박두병(두산), 조선유지 인천공장 김종희(한화), 선경직물 최종건(SK),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 이병철(삼성) 등이 꼽힌다. 이승만 정권은 국유화했던 일제시대의 은행들도 민간에 불하했는데 이병철은 흥업은행, 조흥은행, 상업은행 등을 인수해 계열사를 확장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이승만 정권은 이밖에도 달러 배정, 차관 제공, 정부 사업권 등 여러 과정에서 특정업자에게 특혜를 주며 대가로 정치자금을 확보했다. 대표적으로 국방부 원면사건이 있다. 국방부가 민수용으로 구입한 원면을 긴급군수물자로 돌렸다가, 일부를 제외한 원면을 다시 일반업자에게 내줘 시중에 팔아 폭리를 취하게 한 사건이다. 일부 기업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재벌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적산불하, 원조물자 배정, 은행대출 및 해외차관 주선 등을 통해 경제인들이 정치인과 결탁해 이익을 나눠 갖는 게 당시에 횡행했다”고 말했다.
이후 장면 정부과 군사정권 시절 부정축재자 처리 과정에서 재벌들은 일대 위기를 맞지만, 결국 유야무야되며 되레 정경유착 관계가 고착화되는 계기가 됐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집권한 장면 정부는 혁명 과제 중 하나로 삼성 등 기업 총수 24명을 부정축재자로 지목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이듬해 4월10일 부정축재자처리특별법을 마련하고 그해 5월17일까지 자수하도록 유예기간을 뒀지만 5·16 쿠데타가 발생했다. 군사정권도 초기 이병철, 이정림(대한양회), 이양구(동양시멘트), 최태섭(한국유리) 등 13명을 부정축재자로 연행하며 강력한 수사 의지를 보였으나, 6월26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과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이 면담한 후 방향을 바꿨다. 군부는 구금 43일 만인 6월30일 기업인들을 풀어주고 부정축재환수절차법을 공포, 부정축재한 돈으로 공장을 만들어 그 회사의 주식을 국가에 납부토록 했다. 이병천 교수는 “4·19 민주혁명의 가장 중요한 요구였으나 부정축재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며 “오히려 재벌이 온갖 특혜를 받아 산업화 주역으로 등장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 과정에서 재벌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단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1961년 1월 한국경제협의회를 만든다. 일본의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을 모델로 삼았다. 협의회는 5·16 이후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6호에 의해 해체됐다가, 다시 1961년 7월17일 경제재건촉진회로 출범한다. 같은 해 8월16일 명칭을 한국경제인협회로 바꿨다. 오늘날의 전경련(1968년 명칭 변경)이다. 1961년과 1962년 초대 회장은 이병철이 맡았다. 재벌들이 주도해 만든 조직체인 만큼 각종 정부 정책에 이들 이권을 반영시키는 활동에 주력했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전경련은 재벌을 위한 정책과제를 제시해왔다”며 “그 결과 국가경제가 재벌 중심 체제로 변질되면서 중소기업이나 소상공 자영업자들이 (재벌의)갑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은 수출에 대한 파격적인 우대를 통해 수출 대기업들의 고속성장을 도왔지만, 반대로 중소기업이나 개인들이 피해를 보는 정책들도 많았다. 1972년 기업들이 사채가 늘어나 줄도산 위기에 처하자 전경련은 그해 6월11일 정부에 구원 요청했다. 이후 8월3일 정부는 긴급재정명령을 발동해 기업들의 사채를 동결 조치하고 이자를 3분의 1 밑으로 경감했다. 덕분에 채무기업들은 큰 혜택을 입었지만 채권자들 사이에서는 수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대표적 정경유착 사례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이다. 1966년 4월 부산 세관은 대량의 사카린 원료가 밀반입된 것을 적발했다. 앞서 군사정권은 1967년 대선을 앞두고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해 비료공장 설립을 기획했다. 정부가 보증을 서고 삼성이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4200만달러의 상업차관을 들여와 울산에 비료공장을 짓기로 했다. 미쓰이사는 차관 대신 기계류를 공급하고 100만달러의 리베이트를 주기로 했는데, 삼성은 100만달러를 불리기 위해 그 일부를 전화기, 에어컨, 사카린 원료 등을 밀수하는 데 사용했다. 밀수가 적발되자 정부는 이 사건을 극비로 했으나 언론에 의해 폭로됐다. 이후 정부는 사건과 무관하다며 발을 뺐고, 이병철은 그해 9월22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복귀는 1968년 2월로, 2년의 반성도 없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60~70년대 개발도상국 발전전략(산업화)은 정부와 재계가 효율적으로 협력하며 시장 실패를 극복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지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부패의 연결고리를 태동시켰다”고 말했다.(②편에 계속)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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