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와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에 관한 감상을 ‘자신만의 언어’로 전달한 것이다. 분위기는 유해졌고, 통상 2시간 남짓한 국가 정상 회담은 이틀에 걸쳐 6시간으로 늘어났다. 이때 통역을 담당했던 최정화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의 ‘콘텐츠’가 푸틴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최정화 교수의 신간 ‘첫 마디를 행운에 맡기지 마라’에는 이런 ‘격 있는 소통’ 비법들이 담겨 있다. 국내 최초의 국제회의 통역사인 저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부터 노 전 대통령까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포함해 2000여 차례의 국제 회의 통역을 거친 ‘소통의 달인’이다. 그는 책에서 지난 30년 간의 국제 통역사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리더들은 남다른 ‘통력’이 있었다”고 통찰한다.
저자에 따르면 ‘통력’은 소통할 때 상대방과 진심으로 교감하는 힘이다. 단순히 유창한 연설과 화려한 표현으로 상대를 교화하는 차원이 아니다. 보편적인 주제로, 자신의 생각을 예의 바르게 표현하고, 상대의 말은 무서울 정도로 경청하는 행위다. 그 과정에는 노 전 대통령의 사례처럼 타인의 문화와 세계를 이해하는 감수성이 동반돼야 한다.
“말은 사리 사욕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다. 서로의 속엣말을 파악하고 내 옆에 있는 이의 마음을 좀 더 잘 헤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소통의 진짜 목적이다.”
저자는 통력이 있는 사람들은 ‘격이 다른 소통’을 펼친다고 말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중국의 기후 변화협약 동참을 촉구하는 연설에서 중국어를 구사했다. 어설프긴 했지만 성조를 따라 하려는 연습 장면이 공개되면서 중국 네티즌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흑인의 역사를 미국의 역사로 드높이는 연설로 흑인에 자부심을 심어줬다. 청자를 염두에 둔 진심의 소통이 상대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통력을 갖춘 ‘자신만의 언어’를 구사하려면 지식과 경험, 인품이 고루 성장해야 한다. 최 교수는 세 조건이 말에 투영돼 ‘나’라는 사람을 비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가까이서 본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미테랑 전 대통령은 방한 일정 중 소음에도 아랑곳 않고 독서를 하는 습관을 보였고, 통역 중에는 사소한 말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고 최 교수에게 전달하는 예의를 갖췄다.
최 교수는 “(미테랑 대통령을 보며) 아주 사소한 것조차 상대방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에 인품과 지식이 더해져 ‘그’라는 사람을 완성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품격은 완성돼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한 겹 한 겹 더해질 때 빛나는 것 같다”고 술회했다.
통력을 다듬어 소통의 격을 높이는 일은 비단 국제 정치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 교수는 문화, 예술, 미디어 등 각 분야의 리더들과 접했던 경험을 토대로 이를 일상에서 실천하고 적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룰도 책에서 소개한다.
가령 여러 상대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첫 인사는 ‘밀도 있는 방식’으로 하는 게 좋다. 단순히 자신의 이름과 정보만 나열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관심 있어 할 만하거나 친근한 소재를 활용하는 방식이 낫다. 저자는 터키 패션 디자이너 제밀 이펙치가 드라마 ‘선덕여왕’의 옷에 매료됐던 경험담을 한국 청중들과 공유한 일화를 소개하며 이해를 돕는다.
상대에게 정중히 부탁을 요청했지만 거절 당했을 때는 어때야 할까. 이 역시 품격 있게 대처하는 것이 좋다. 저자는 거절 의사를 받았다면 “빨리 피드백을 줘서 고맙다.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감사 메시지를 빠르게 보내라고 제안한다. 그러면 지금은 거절 당했을지라도 상대가 덜 무안할 수 있고, 향후 꼭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된다. 거절하는 이의 미안함을 덜어주는 배려로 오히려 소통의 품격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세상에 대충 만나도 되는 사람은 없다’거나 ‘나이에 관계 없이 안부를 먼저하라’는 소통 태도는 인생 전반을 성찰하게도 한다. 최 교수는 상대방과의 시간이 짧건 길건 ‘밀도 있는 만남’을 위해 컨디션을 조절하고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안부를 전하며 즐거움을 함께 공유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책의 말미에 적힌 비유는 그의 소통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준다. “사막을 이루는 모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엄청난 모래 중 두 손으로 정성껏 쓸어 담은 모래는 특별하다. 나머지 모래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만남 역시 상대를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별로 만들겠다는 마음가짐이면 충분하다. 상대를 별로 만들면 나는 그 별을 품은 우주가 되는 것이니, 그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첫 마디를 행운에 맡기지 마라'. 사진/리더스북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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