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마을 주민의 길 안내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여성은 내 질문을 듣자 소리를 쳐 누군가를 불렀다. 곧 그녀의 남편인 듯한 남자가 열려 있던 대문 쪽으로 걸어 나온다. “실례합니다. 데르수 우잘라의 기념비는 어디 있나요?” 나는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렇게 저렇게 가라고 방법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중단하고 아예 앞장을 선다.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작열하는 여름 태양 밑을 걷는 그의 모습이 미안해 길만 알려 달라고 했지만, 그는 데르수의 기념비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온 한국의 방문객이 신기해서인지 마을의 변천사에 대해 쉴 새 없이 얘기를 하며 안내를 해 준다. 큰길을 따라 죽 올라가면 되는 터라 길 찾기가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런 친절은 사양하기보다 감사히 받는 쪽이 예의일 터, 덕분에 마을 주민과 대화하는 기회로 삼았다.
40대쯤으로 보이는 그는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꼬르폽스키 ‘토박이’다. 물론 그의 조상인 러시아인들이 우수리, 연해주, 하바롭스크 등지로 건너오기 전엔 데르수 같은 나나이족과 역시 퉁구스계인 우데게족(아르세니예프 당시의 명칭은 우데헤)이 토착 원주민이었다. “저어기, 길 건너편에 녹색 식료품 가게 보이지요? 그 옆이에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우리가 따라 올라간 큰길과 가로로 만나는 차도의 건너편이다. 멀리 야산 능선을 배경으로, 왼쪽부터 약국, 파란색 지붕 식료품점, 간이매점(키오스크)식 빵집, 자동차 수리점, 그리고 다시 초록색 지붕의 식료품 가게가 늘어서 있고 그 옆에 기념비가 보인다. 그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고 헤어져 발길을 재촉했다. 교차로의 신호등을 기다리는 마음이 조급하다. 길을 건너 녹색 식료품 가게 쪽으로... 아! 마침내 나무들과 들꽃들 사이에 화강암으로 서 있는 데르수를 만났다!
산 능선을 배경으로 약국, 식료품점, 빵집, 자동차 수리점 등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사진/필자 제공
데르수 기념비 뒤의 남자
기념비로 다가가는데 서걱서걱, 부스럭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린다. ‘뭐지? 풀숲의 다람쥐인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기념비 뒤쪽으로 다리가 나와 있다. 살짝 더 다가가보니 기념비에 가려져 있던 어떤 남자의 앉은 모습이 보인다. 얼핏 보아도 노숙인 같다. 기념비의 사진을 찍고 싶은데 그에게 방해가 될까봐 잠시 망설인다. ‘그래도 이까지 왔는데!’ 나는 일단 기념비와 그 주변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리고 이런 조형물을 볼 때의 습관대로, 기념비를 한 바퀴 돌면서 관찰하고 싶은 마음에 고민이 된다. ‘기념비에 쓰인 글귀도 읽어보아야 하는데...’ 가까이서 한 바퀴 돌려면 뒤쪽 좁은 공간에 앉아 있는 그를 지나쳐야 한다. ‘내가 지나가면 불편해 하실 텐데...’ 또다시 망설여진다. 이렇게 주저하는 이유는 왠지 그가 이 공간의 주인 같고 그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갈 수는 없는 일. 나는 결심을 하고 조금 큰 소리로 그를 향해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데르수 우잘라 기념비를 보러 왔는데 한 바퀴 돌아도 될까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 그는 그곳의 주인이 아니고 내가 굳이 양해를 구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자리한 작은 공간과 그의 호젓한 시간을 방해하게 된 것도 사실이니 그 방해를 최단으로 하기 위해 나는 몹시 잰 걸음으로 기념비를 한 바퀴 돌았다. 그 짧은 몇 초 사이 그의 모습과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왔다. 기념비인 바위 뒤편에 옷 한 벌이 걸쳐져 있다. 아마도 빨아서 말리는 것이리라. 그는 작은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며 담배를 꺼내 피우는 중이다. 그의 살림살이는 그게 다인 듯 했다.
데르수 우잘라 기념비 뒤를 거처로 삼아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 사진/필자 제공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잠시나마 타인에게 자신의 공간이 드러나 불편했을 수 있는 그를 더 방해하게 될까봐 그만두었다. 바위 뒤가 그의 거처이고 그가 마치 그곳의 주인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래서 그에게 방해가 될까봐 더욱 조심스러웠던 것은, 그 바위가 데르수 우잘라의 기념비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모습은 백 년도 훨씬 전 데르수가 야생을 떠돌며 살던 삶을 상기시킨다. 그래서인지 이 러시아인 노숙자가 데르수의 바위 뒤에 머물고 있는 게 왠지 잘 어울려 보인다. 데르수가 봤다면 친구를 만난 듯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바위 뒤의 주민은 내게 또 한 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몹시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내가 데르수에 대한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막연히 멋진 모험이라고 생각했던 아르세니예프 탐사대의 진짜 현실은 오랫동안 씻지도 못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정도의 불편함보다 더욱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는 생존 자체일 터. 숲에서 야영하며 만나는 곰과 호랑이에, 홍수와 태풍, 한파를 견뎌내며 살아남는 것이 관건이다. 몇 시간 후, 나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10대 소년소녀 커플과 함께 꼬르폽스키 마을 깊숙이 있는 숲을 지날 때, 나는 끊임없이 얼굴로 달려드는 벌레들을 쫓아내느라 말들처럼 고개를 좌우로 계속 흔들며 속으로 탄식했다. ‘아! 벌레 때문에 탐사대는 못하겠구나...’ 마치 예전에 몽골에서 말을 타고(달려드는 파리떼를 쫓느라 계속 고개를 흔들던 그 말들이다) 산을 넘어 유목민인 차탕족 마을에서 며칠을 보낸 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과 비슷하다. 그들을 보고 난 후 나는 이전에 입버릇처럼 되뇌던 ‘나는 유목민 스타일이야’라는 말을 그만두었다, 부끄러워서.
기념비 바위의 뒤쪽은 재빨리 지나쳤지만, 한 쪽 옆면에 쓰인 글귀는 읽어야 해서 몇 초간 더 머물렀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V. K. 아르세니예프의 안내자였던 데르수 우잘라가 1908년 사망한 현장에 기념비를 세우다. 감사하는 극동 러시아인들, 1997년”
데르수 우잘라 기념비 앞에 누군가가 가져다 둔 꽃이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데르수의 무엇이 우리를 매료시키는가?
마을사람들이 세운 기념비 하나 밖에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는데 굳이 데르수를 만나겠다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 꼬르폽스까야역에 내렸을 때 그리고 기념바위를 보았을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심지어 감개가 무량하기까지 했던 것은 순전히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의 책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때문이다. 앞서 데르수의 매력을 일부 언급했지만, ‘숲의 사람’인 그가 우리를 매료시키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선량함과 자연과의 일체감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냥해 온 동물을 민족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주위 사람들과 나눠 먹으며, 그렇지 않으면 다음 사냥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모든 자연물, 동식물과 교감하는 그는 물고기의 말을 알아듣고 나쁜 기운이 도는 곳을 피할 줄 안다.
이른바 ‘문명인’들이 자연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는 달리, 데르수에게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는 단순함이 있다. “별이 뭘까?”라는 질문에 “저기 별 떴다. 보면 된다.”하고, “달은 대체 뭘까?” 물으면 “눈 있는 사람, 달 본다. 저게 달이다.”하는 식이다. 납득 안 되는 질문들을 자꾸 던지는 까삐딴(캡틴)에게 그는 되묻는다. “다 볼 수 있어. 근데 대장은 맨날 묻는다. 대장 눈 나빠?”(아르세니예프 지음, 김욱 옮김, <데르수 우잘라>, 서울: 갈라파고스, 2005, 122~123쪽).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데르수의 매력은 다음의 일화 속에 나타난다. 아르세니예프가 저녁식사 후 남은 고기조각을 모닥불에 던져 넣자 데르수는 그를 나무라며 내일 오게 될 타이가의 많은 다른 ‘사람들’―너구리, 오소리, 까마귀, 쥐, 개미 등등―이 먹을 수 있도록 불에서 고기를 끄집어내어 집밖으로 던져 놓는다(앞의 책, 205~206쪽). 그에게는 타이가 숲의 모든 존재가 더불어 살아가는 주민이고 친구이기에.
데르수와 아르세니예프가 걸어갔던 우수리 지방 시호테알린 산악지대의 밀림과 강변에는 조선인들의 흔적도 등장한다. 아르세니예프가 찍은 데르수의 사진에서 조선의 농민들과 녹두장군을 떠올린 것은 나의 과한 느낌이었을까? 중국인들은 나나이, 우데게 원주민들을 속여 괴롭혔고 러시아인들은 그들을 야만인으로 깔보았는데, 조선인들은 어땠을까? 데르수가 중국인과는 달랐던 조선인 역시 꺼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르세니예프가 1906년에 찍은 데르수 우잘라. 사진/위키커먼스(블라디미르 클라브디예비치 아르세니예프 작품집(총6권), 1권, 블라디보스토크: 알마나흐 "루베쥐", 2007년, 704쪽.)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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