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우당탕탕.
20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상수역 인근의 한 건물. 9인조 얼터너티브 케이팝 크루 바밍타이거(‘호랑이 연고’를 뒤집은 영문명) 사무실이 위치한 이 곳에 들어서자 모든 것이 무질서하게, 아주 창조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각기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이들은 재미난 ‘판’이 열린 것처럼 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몇은 물병 돌리기를 하며 놀고 다른 몇은 창고를 ‘우당탕’ 뒤지더니 금빛 찬란한 조각상을 이고 와 내려놓는다.
“이게 뭔지 아시면 아주 깜짝 놀라실 겁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실제 작품이에요. 경계를 넘어온 엔터테이너시죠. 저희보다도 이것 좀 잘 나오게 찍어주십쇼.”(산얀·총괄 프로듀서)
가구 콜렉터인 지인의 건물을 임대해 사무실로 쓰고 있는 이 공간에선 뇌적 상상을 자극할 ‘아이템’이 곳곳에서 튀어 나왔다. 달리의 실제 작품부터 최소 수백만원에서 최대 수천만원에 이르는 가구들, 동물 형상의 조각들, 곳곳 비치된 생명력 넘치는 화분들…. 시계마저 녹이던 달리의 초현실적 그림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멤버들은 “비싼 스포츠카보다도 이런 것들은 사람의 숨결이 느껴져 좋다”더니 웃는다.
“21세기, 우리는 인공물들에 뒤덮여 살아가고 있잖아요. 특히 서울이란 도시는 지나치게 헤게모니적이죠. 가끔은 자연적이고 사람 내음이 느껴지는 곳에서 안정을 찾는 것도 좋아요.”(오메가 사피엔·래퍼) “생물은 큰 음악적 영감이 되죠. 함께 숨 쉬는 친구 같은 존재니까요. 하하.”(산얀)
9인조 얼터너티브 케이팝 크루를 표방하는 바밍타이거가 재그재그 모양의 살바도르 달리 실제 작품(맨우측)을 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일 서울 마포구 상수역 인근 사무실에서 만난 산얀, 원진, 언싱커블(테이블 왼쪽)과 소금, 오메가 사피엔(테이블 오른쪽). 다른 멤버로는 머드더스튜던트, 어비스, 헨슨황, 잔퀴가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호랑이 연고(Tiger Balm), 아플 때 만병통치약이라는 이 약의 전래는 지금 전 세계로 퍼져가고 있다.
크루는 2018년 첫 믹스테입을 시작으로 지금 국내외 가장 ‘핫’한 팀으로 부상 중이다. 아시아 여러 문화 요소를 덧댄 기괴한 음악과 영상이 특징이다. 한국 배달 문화와 인터넷 방송, 홍콩 느와르, 일본과 중국의 무도 문화…. 정체를 분간하기 힘든 이 초국적 세계관에 저 멀리 태평양과 대서양 건너 국가들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올해 북미 최대의 음악 행사 ‘SXSW(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는 웹 사이트 메인 페이지에 이들을 기존 케이팝의 틀을 깨는 대안, ‘멀티내셔널 케이팝 밴드’로 소개하고 있다.
“애초 이 팀을 기획할 때부터 기성 레이블의 틀을 깨는 ‘뭔가’를 만들어보자 했어요. 아시아의 전통 있는 연고, 타이거 밤을 뒤집어보면 팀명으로 색다르고 재밌을 것 같았습니다.”(산얀)
9인조 얼터너티브 힙합크루 바밍타이거. 사진/바밍타이거
이 이상한 혼재의 세계를 창조하는 건 다양한 출신의 멤버들이다. 중국과 미국에서 초중고를 나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는 사피엔을 중심으로 부산, 파주, 광주, 대전 등 다양한 지역 출신의 이들이 뭉쳤다. 다채로운 배경의 이들은 각자 신선한 아이디어들을 섞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는 편이다.
“서로 비슷한 느낌이 정말 없어요. 처음에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나중에는 이게 원래 누구 아이디어였는지 애매해지는 경우가 다반사. 모두 색깔이 천차만별이라 우리끼린 서로 만화 캐릭터 같다고들 해요.”(산얀)
해외에서는 이들을 ‘케이팝의 대안’으로 소개하지만 정작 이들은 케이팝을 들으며 성장한 세대들이다. 거진 90년대생들이고 80년대생도 있다. ‘케이팝을 어떻게 생각하냐’ 묻자 이들은 오히려 “케이팝이 무엇인 것 같냐”고 반문을 해왔다. 지금의 케이팝을 “특정 장르로 설명하기 보단 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봐야 할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케이팝은 한국 음악이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 특정 현상을 일컫는 것 같아요. 그런 현상의 관점에서 봤을 때 저희는 케이팝이 자랑스럽고 되려 이런 시기에 저희가 활동하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해요.”(산얀) “어떻게 보면 그런 관점에서 저는 영화 ‘기생충’도 케이팝 아닌가 생각해요.”(언싱커블)
20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상수역 인근의 한 건물. 9인조 얼터너티브 케이팝 크루 바밍타이거(‘호랑이 연고’를 뒤집은 영문명) 사무실이 위치한 이 곳에 들어서자 모든 것이 무질서하게, 아주 창조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멤버들이 생수통을 던져 바로 세우는 즉흥 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결성 직후부터 이들은 ‘바밍타이거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케이팝에서 최근 유행하는 세계관의 의미를 빌려왔지만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 중이다. 믹스테이프부터 ‘I'm Sick’, ‘Armadillo’, ‘Kolo Kolo’ 등 팀 단위 싱글 발매 때마다 카툰(만화)을 그려 공식 소셜미디어(SNS)에 업로드 중이다. 알쏭달쏭한 캐릭터들이 음악에 담긴 의미를 암호 해독처럼 풀어준다.
“잘 찾아보시면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만화를 본 후에 음악을 들어보시고, 또 뮤직비디오와 만화를 비교해보시면 색다른 재미가 있으실 겁니다.”(산얀)
멤버들 각자가 좋아하는 뮤지션도 각양각색이다. 사피엔은 퍼렐 윌리엄스와 공중도둑을, 산얀은 혁오와 크러쉬를 즐겨 듣는 뮤지션으로 꼽았다. 소금은 샤데이와 태양, 언싱커블은 레드벨벳과 쥬시 제이를 각각 좋아하는 뮤지션이라 얘기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제 음악적 뿌리가 H.O.T였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카리스마 장우혁, 제가 정말 좋아했습니다.”(원진)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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