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미스터리)⑩은행 믿고 돈 맡겼는데…'사유재산' 행방불명
사라진 53조7100억원…"청나라 국채를 이제 와서"
2024-12-03 18:30:00 2024-12-04 13:02:49
[뉴스토마토 한동인·유지웅 기자] 맡긴 사람은 있는데, 맡은 은행은 "모른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35년간 조선인들이 일본, 만주, 국내 등지에서 벌어들인 전 재산이었습니다. 피해자는 10만명, 총피해액은 53조7100억원(현재가치 기준)으로 추산됩니다. 1인당 피해액은 50억원부터 300억원까지 다양합니다. 이른바 '미군정 57호 사건'입니다. 
 
윤기영 미군정 57호 피해자협회 부회장이 보관 중인 예치증. (사진=윤 부회장)
 
은행 믿고 맡겼는데…80년 '오리무중'
 
3일 정부와 학계 등에 따르면 미군정은 광복 직후인 1946년, 법령 57호를 공포했습니다. 조선인이 소지한 일본돈은 모두 7개 금융기관(조선은행·조선식산은행·조흥은행·조선상업은행·조선신탁회사·조선저축은행·금융조합연합)에 예치해야 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대신, 보관증을 쥐여 줬습니다.
 
위반하면 군사점령법원이 결정하는 형벌을 받는다는 말에, 피해자들은 은행을 믿고 돈을 예입했습니다. 여러 피해자 증언을 종합하면, 미군정은 예치한 엔화를 상응하는 한화로 3개월 안에 돌려주겠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나 8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배상은 없었습니다. '57호 예입금'이 한국으로 이관되면서, 돈의 행방은 더욱 묘연해졌습니다. 현재로선 박정희정부가 이 자금을 유용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일본돈 중심으로 사유재산을 형성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대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사유재산을 몰수당한 이들은 대부분 괴로워하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한국금융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전표철(왼쪽)과 일본은행권 보관부본. (사진=유지웅 기자)
 
이용자 권익 뒷전…"정부 일 대신했을 뿐"
 
할아버지·아버지로부터 '57호 보관증'을 물려받은 후손들은 은행에 '돈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신뢰'를 근간으로 작동하는 은행은 돈이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자료를 폐기했다는 겁니다. 
 
자료가 없다면, 돈은 어디 있냐는 물음에도 "전혀 모른다"고 했습니다. 정부 일을 은행에서 대신했을 뿐, 은행에서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미군정 57호마저도 "각 금융기관은 입금된 지폐를 다른 통화와 별도로 안전하게 보관해야 하며, 군정청 재무국에 각 통화의 금액을 보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관리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이 은행 측에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입니다. 만약, 해당 자금이 한국정부로 흘러 들어갔다면 이 역시 은행이 증명해야 할 문제입니다. 
 
실제 한국금융사박물관(구 조흥은행박물관)엔 '전표철'과 '일본은행권 보관부본'이 존재합니다. 조흥은행 서대문지점이 미군정 지시에 따라 일본은행권을 회수하면서 이를 기록한 자료입니다. 
 
여기엔 예입 날짜, 예금자 이름(180명), 순번, 예금액, 지점장 이름·서명 등이 담겨 있습니다. 은행·예금자가 도장을 찍은 후, 반씩 나눠 갖은 흔적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신한은행 관계자는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가 박물관에 전시된 장부"라며 "여기에 이름이 올라간 예금자가 있고, 그 예금자가 관련 증서를 갖고 있다면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1946년 당시 은행은 지금과 같은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이 구축돼 있지 않아서, 사고로 인해 관련 자료가 소실 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의문점은 여전히 남습니다. 나머지 피해자에 대한 기록이 소실된 데 대해, 은행 책임은 없냐는 건데요. 장부에 기록된 180명을 제외하면, 피해자는 예입증서가 있더라도 은행 측과 대조해 볼 길이 없습니다. 
 
상법 제235조는 "합병 후 존속한 회사 또는, 합병으로 인해 설립된 회사는 합병으로 인해 소멸된 회사의 권리의무를 승계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 은행법 제52조는 "은행이 업무를 취급할 때 은행 이용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신한은행(조흥은행과 합병)은 자사 과실을 이유 삼아, 이용자 보호라는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은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상업은행은 한빛은행(우리은행의 전신)에 합병됐는데요. 
 
조선상업은행에 10만엔(현재가치 100억원 추산)을 예입한 한 피해자는 우리은행으로부터 "유감스럽지만, 자료가 없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원론적 답변을 받았습니다. 
 
'조선식산은행'의 후신인 한국산업은행 관계자는 "문서는 10년 정도 보존기간이 지나면 다 폐기한다"며 "청나라 시대 국채를 미국이 이제 와서 요구하는 거랑 비슷하게 들린다. 그런데 그것도 역사적으로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이란 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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