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흥의 한 언어치료센터에서 재활사가 장애 아동의 뺨을 때리고 밀치는 등 폭력과 학대를 일삼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많은 이들이 내 일처럼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발달장애인의 엄마인 전, 대중의 장애인식을 민감하게 파악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들 손을 잡고 거리를 나가는 순간부터 온몸으로 특정 분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거든요. 모두가 알다시피 올해는 정말 힘든 한 해였습니다.
단지 어떤 사건이 있었던 해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올해가 정말 힘들다고 느끼는 건 그만큼 아들이 쑥쑥 자란 한 해였기 때문일 거예요. 어린이였던 아이가 ‘완전한 어른’의 몸을 갖게 되면서 아들을 향한 세상의 관용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장애 비장애를 떠나 어른을 대할 때와 아이를 대할 때의 태도는 저부터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아들에 대해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태도의 변화, 그 범주를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바야흐로 장애 혐오를 직격으로 받는 세상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세태가 콘텐츠에 반영된 것일까 아니면 콘텐츠가 이끄는 방향대로 인식이 따라가는 것일까 가끔 궁금해집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똑같은 ‘장애’를 대함에 있어서도 나이와 성별에 따라 사회 안에서의 수용 여부가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몇 년 전 지방의 한 산속에서 발달장애인 여학생이 실종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모든 언론이 대대적 보도에 나섰고 끌어올 수 있는 모든 경찰력이 동원된 덕분인지 며칠 후 여학생은 무사히 부모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제주도에서도 발달장애인 남학생이 실종됐습니다. 하지만 이 소식은 몇몇 장애 언론을 중심으로 알려졌을 뿐이었어요. 동원된 경찰 인력도 여학생에 비할 바 아니었죠. 그 때문이었을까요? 남학생은 며칠 후 바다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됐습니다.
지난해 전국적 신드롬을 일으켰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볼게요. 이 드라마는 미국 드라마 ‘별나도 괜찮아’의 전신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드라마를 집필한 문지원 작가도 ‘별나도 괜찮아’를 참고했다고 했었죠.
그런데 미국에서도요. ‘별나도 괜찮아’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더 큰 관심과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고요? ‘별나도 괜찮아’의 주인공은 남자였거든요.
EBS ‘딩동댕 유치원’에서도 자폐성 아동이 출연합니다. 아주 예쁘게 생긴 별이에요. 별이의 등장은 고무적이었고 반가웠지만 여자 캐릭터를 선택한 것에 대해선 아쉬움이 살짝 남습니다. 실제로 발달장애인 성비를 살펴보면 남성 비율이 월등하게 많기 때문이에요.
아마도 ‘받아들여짐’을 고려한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대함에 있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으로 이분화할 수 있을까요.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그 기준은 정당할까요.
콘텐츠는 ‘팔려야’ 의미가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케팅을 고려할 수밖에 없고 콘텐츠가 뉴스 형태라면 사람들에게 읽혀야 의미가 있겠죠. 그래서 콘텐츠가 앞장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한 조건을 갖춘 장애인에게만 수용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어리거나, 여성이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한없이 불쌍해서 동정심을 유발하는 그런 일련의 조건 말입니다.
정말로 궁금해요. 그래서 다시 한번 묻습니다. 현실의 세태가 콘텐츠에 반영된 것인가요. 아니면 콘텐츠가 앞장서 그러한 장애인식을 주도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콘텐츠의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요. 성인의 몸을 지닌 남성 발달장애인을 자식으로 둔 저는, 자꾸만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류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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