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계는 이준석이라는 제1야당 대표후보 이야기로 뜨겁다. 이준석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이 현상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의미를, 기존 정치세력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민주당은 이준석에 맞서는 카드로 이동학 최고위원을 지명했지만, 뻔하고 무능한 전략일 뿐이다. 이준석과 이동학이 겹치는 지점은 생물학적 나이 뿐이다. 이준석에게 보이는 새로움이 이동학에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전략은 그저 따라하기 정치에 다름 아니다. 대중이 이동학의 등장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이준석이 아니었다면 민주당이 선택하지 않았을 게 뻔한 카드로 국민을 우롱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아무리 쇼라지만, 적어도 그 중심엔 약간의 진정성이 필요하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이준석이 들고나온 청년기수론으로 더 큰 피해를 보게 된건 정의당이다. 정의당은 지난 총선부터 청년정치를 당의 주요 쇄신전략으로 들고나와 장혜영과 류호정이라는 두 인물을 당의 간판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년정의당이라는 정당 내 정당을 창당, 청소년인권운동가 출신의 당대표를 뽑고, 정의당이야말로 청년정치의 중심임을 천명해왔다. 하지만 정의당이 내세웠던 청년정치보다 이준석의 당대표 출마가 더 큰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는 이 자명한 사실 속에서, 정의당은 그들의 청년정치 전략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
정의당의 두 청년정치인과 신지예씨를 비판한 내 글에 대한 반론에서, 홍명교 활동가는 내가 이준석에 비해 장혜영과 류호정의 경험을 무시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두 의원이 자신과 같은 활동가 출신이며, 따라서 이준석을 비판할 정당성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활동가 집단의 축소가 진보정치의 약세로 이어지고 있다는 논리를 편다. 활동가 중심의 시각이다. 평론가 정주식은 내가 글에서 청년 진보정치인에 대해 짧게 비판한 이유를, 그런 이야기가 당연한 사람들로 내 주변이 채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반대로 말하면, 정주식의 주변은 류/장 두 의원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홍명교 같은 활동가나 정의당 지지자들로 채워져 있다는 뜻이다. 정의당의 지지율은 여전히 5% 내외로, 지금은 안철수의 국민의당보다도 낮다. 그리고 홍/정 두 사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 곳의 시각만으론, 결코 한국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이준석에 열광하는 여론이 들리지 않는 공간에 서 있다면, 더 넓은 곳으로 나와야 할 개구리는 내가 아니라 홍/정 두 정의당 지지 논객들이다.
한 때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로 유명했던 신지예는,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나를 386이라 부르며 비난했다. 내용 없는 그 공허한 글에서, 신지예는 ‘영꼰대’, ‘올드꼰대’, ‘아저씨들’ 등의 혐오를 부추기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준석은 ‘꼰대 돌풍’이라고 썼다. 한 때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로 추대되었던 인물의 글쓰기가 단락개념조차 모르는 수준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내용 없이 증오와 혐오만 가득한 글을 읽으며 왜 녹색당이 아니라 신지예만 정계에 살아남아 유령이 되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신지예는 진보적 청년정치를 엔터테인먼트로 생각하는 연예인 지망생일 뿐이다. 그에게선 서울시와 국가를 어떻게 경영할지에 대한 비전은 물론,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계층에 대한 아무런 공감대도 느낄 수 없다. 정치낭인으로는 적합할지언정, 국민의 마음에 다가서는 정치인이 되기엔 함량미달인 아이돌 워나비, 그게 신지예다.
청년정의당, 류호정, 장혜영, 신지예, 이동학, 진보진영이 내세우는 청년정치인들이 요즘 아젠다로 미는 주제는, 20대도 국회의원에, 40세 이하도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게 해달라는 피선거권 연령제한 폐지다. 정치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옳은 이야기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하면 할 수록, 그들이 청년정치라는 프레임에 더 강하게 걸려든다는 것이다. 한국정치가 젊어져야 한다는 건, 생물학적 청년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보다 넓은 개념이다. 정치적으로 옳바른 이 주장이 공허한 건, 이 청년정치인들의 주장이 김종인이나 박근혜 같은 노쇄한 보수들이 이미 이준석 등을 발탁하며 선점했던 아젠다라는 점이다. 게다가 한심한 건, 2030 청년정치인들이 선거출마 연령제한을 없애달라고 주장하는 의도를, 국민 대부분은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신인 본인들을 위한 전략이라고 인식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상식은, 적어도 공익보다 사익을 우선시하는 정치인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특히 40대 이하의 청년정치인만이 희망인 듯 주장하는 그들의 생물학 정치는, 우생학을 떠올리게 할 뿐만 아니라, 잠재적 지지자의 대부분이 40대와 50대라는 정치현실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전략적 무지의 소치로 보인다. 그리고 자칭 진보적이라는 이들 청년들의 정치야말로, 국민의힘이 선거철마다 구사하던 구걸의 정치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청년정치와 젊은 정치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이들의 전략은 젊기는 커녕, 낡고 노후한 전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청년의 정체성 정치는 작은 정치다. 청년정치가 정말 사회를 개혁하려면, 정체성 정치 이상을 상상해야 한다.
기자 김준일은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정의당이 나아가야할 길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눠 지적했다. 정의당의 두 청년정치인에 대한 내 비판에 부족했던 논리를 그의 지적을 통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김준일의 지적은, 굳이 글로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당연한 상식이었다. 김준일은 한국사회가 어쨌든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진보는 한 방향이 아니다. 특히 시장자유와 개인자유를 축으로 만든 4분면에서, 정의당 지지자의 상당수는 권위주의 성향으로 나타난다. 정의당 내부에서도 이미 인천연합 등의 계파정치를 벗어나 대중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지 오래됐지만, 수권정당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 당연한 길을 아는 것과, 그 길로 나아가는 실천은 다른 일이다. 정의당은 이미 국민들에게 운동권정당, 젠더정당, 본문이 아니라 댓글만 다는 정당, 데쓰노트가 정체성인 정당으로 인식되어 있고, 심지어 정의당 내부에서도 그런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고치지 못한다. 정의당의 진짜 문제는 정의당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경직성에 있다.
김준일은 진보를 위해 진보를 버리라고 말한다. 굳이 진보라는 말을 내세워야 할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와 탈핵을 말하지 말고, 그 아젠다가 국민의 삶에 왜 중요한지를 말해야 한다. 이념에서 삶과 민생으로가 정의당이 살 길이다. 그리고 이재명의 포퓰리즘에서 배우라고 말한다. 정의당의 포지션을 민주당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이재명 지사야 말로, 정의당이 그 차가운 머리에서 뜨거운 심장으로 옮겨갈 좋은 사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운동권 정당을 벗어나야 한다. 국민의힘은 반공, 민주당은 반독재라는 의식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주장해온 낡은 수권세력이다. 문제는 정의당마저 반기업, 반재벌이라는 부정적 규범으로만 정치적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의 경제현실을 직시한 수권정당이라면, 반드시 반도체를 비롯한 과학기술에 관심을 기울이고 정책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의당은 반도체 이야기만 나오면 자동으로 삼성이라는 이슈에 과몰입한다. 대기업의 폭력적 노동탄압에 대한 반대와, 반도체 기술력을 통한 국가발전은 공존가능한 철학이다. 하지만 정의당의 상상력은 삼성에서 멈추고 진화하지 않는다. 정당 전체가 경직되어 있고,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준일은 정의당이 국민의힘과 민주당에 싫증난 국민의 대안 플랫폼으로 서서히 진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캐나다 신민당 NDP의 역사에서 정의당이 생존전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캐나다의 신민당은 자유당과 보수당 사이에서 단 한번도 집권하지 못했지만, 25~30%의 꾸준한 지지율 속에서 캐스팅 보터로 현재 캐나다의 복지국가 정책 대부분을 만들어낸 정당이다. 중동계 이민자가 현재 당대표일 정도로 신민당 내부는 유연하다. 집권당을 비판하면서도, 국민의 삶 속에서 필요한 정책들을 어떻게든 만들어내는 전략, 그것이 정의당의 청년정치인들이 고민해야할 모든 것이다.
청년정치인의 활약이, 경직된 한국 정치생태계에 활력이 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생물학적 정치에 몰두하는 현재의 그들에게서 나는 어떤 청년의 모습도 발견할 수 없다. 국민은 삶의 무게를 아는 정치인을 원한다. 그런 청년이라면, 피선거권 연령 하향이나 구걸하며 국민에게 응석을 부릴 시간은 없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이미 서민의 삶은 무너져버렸다. 하지만 그 어떤 청년정치인도 그 국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젊음을 정치의 특권으로만 사용하려는 사람들에게, 국민이 보낼 지지는 없다. 그 젊음이 국민 정서에 닿으려면, 치열하게 걷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적어도 힘들고 지친 국민들에게 이준석은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국민의 삶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없다면, 청년정치에 희망은 없다. 현재의 진보 청년정치는 낡았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heterosis.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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