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일본 대신 한국행 선택한 것이 '민주화 투쟁 인생' 밑거름 돼"
윈라이 '미얀마 군부독재 타도위' 위원장
군부독재 항거하다 1993년 한국으로
공원으로 살면서 '버마행동' 만들어 민주화 투쟁
"군 스스로 '패배' 예감, 총 안 되니 대포 앞세워"
"미얀마 안정되면 한국과는 형제나라 될 것"
2021-06-27 06:00:00 2021-06-28 18:36:02
 
[뉴스토마토 신태현 기자] "처음에 아는 형이 일본으로 가라고 했지만, 되도록 한국으로 가도록 도와달라고 했어요. 독재 국가에서 민주 국가로 바뀌었으니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한겁니다. 실제로도 그것이 거름이, 도움이 되는거죠."
 
지난 25일 인천 부평구에서 <뉴스토마토>와 인터뷰한 윈라이 미얀마 군부독재 타도위원회 공동위원장 가슴에는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 배지가 달려있었다.
 
대학 시절 군부에 맞서다가 쫓기는 신세 
 
1972년 미얀마(버마) 제2의 도시 만달레이에서 태어난 윈라이 위원장은 대학생 시절 군부에 맞서다가 쫓기는 신세가 됐다.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독재 정권은 1988년 8월8일 정점에 이른 민주 항쟁(8888 항쟁)이 벌어지자 1990년 총선을 실시했다가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에게 의석 80%를 내주는 대패를 하고 만다. 이후 선거를 인정하지 않고 철권 통치를 이어가는 상황이었다.
 
윈라이 위원장은 "88년과는 달리 90년도에는 운동이 작아져 학생, 승려만 했다"고 설명했다.' 8888 항쟁'으로만 학살된 인원이 3000명으로 추산된다.
 
88년과 90년 모두 운동에 참여한 윈라이 위원장을 잡으러 군인과 경찰이 집으로 2차례 들이닥쳤다. 비록 몸을 피한 상태였지만 압박은 점점 거세졌다. 윈라이 위원장은 "처음에는 (한국으로 치면) 동사무소장인 아버지 친구가 저를 보증해줬다"며 "하지만 2번째 들이닥칠 때는 그 분이 정보를 미리 주면서 '보호해줄 수 없으니 도망가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홀로 중국으로 도피, 태국 거쳐 한국으로
 
급한 마음에 하루길인 중국으로 홀로 3개월 도피했다가 다시 미얀마로 돌아와 위조 신분증과 여권을 만들고 안전한 태국으로 탈출, 반년쯤 체류하다가 1993년 한국으로 입국해 경기 광주시 종이박스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독재 국가에서 민주 국가로 바뀌었다는 사실 하나 밖에 없었다.
 
힘든 일을 하지 않던 대학생에게는 쉽지 않은 생활이었다. 윈라이 위원장은 "냉장고나 텔레비전을 포장하는 큰 박스를 만들었다. 피멍이 나고 서러운 마음에 남몰래 화장실에 가서 울었다"고 말하며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가리켜보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타국 생활을 거듭하며 언어를 배우려는 생각이 강해진 윈라이 위원장은 마땅한 교재가 없어 독학에 나섰다. 한국인 동료들의 말을 듣고 미얀마어로 발음을 적어놓았다. 이후 공장 동료만 자신의 한국어를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길거리로 나갔다. 모르는 사람이 한번에 알아들을 때까지 발음을 교정하고 나중에는 책으로 한글을 공부했다.
 
한국서 동포 돕다가 실직하기도
 
한국에서 같이 고생하는 동포의 어려움을 보아넘기지 못해 직장을 그만둔 적도 있었다. 미얀마 사람이 폐에 물이 차 심장을 누르는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장기간 무보수 통역을 해주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마땅히 통역해줄 다른 기관이나 사람이 없었다.
 
고국에서보다 한국에서 지낸 세월이 길어지면서 윈라이 위원장 본인도 자리를 잡았다. 인터뷰 장소는 지난 4월 친구로부터 인수한 식당 밍그라바(미얀마어로 '안녕하세요') 2호점이었다. 1호점은 갓 결혼한 부인에게 일터를 만들어주기 위해 5년전 차렸다고 한다. 부평은 미얀마인들에게 '만남의 장소'로 통하는 지역이다. 코로나 이후에도 미얀마 사람들에게 음식을 배달하며 버티는 중이다.
 
2004년에는 동료들과 버마행동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한국 내 미얀마인들에게 인권 교육을 하고 고국에서 생소했던 퇴직금 개념을 일깨워줬다. 또 한국 주재 미얀마 대사관하고도 싸웠다. 투쟁 주제는 한국 내 미얀마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거두고, 여권을 빼돌려 다른 미얀마인에게 파는 행태 등이었다.
 
한국 '민주 현대사' 번역해 고국에 알려
 
정치 활동도 빠질 수 없었다. 신문을 만들어 한국 주요 뉴스를 번역하고, 미얀마 군부에 맞서는 고국 내 단체 소식을 게시했다. 대사관 앞에서 민주화 촉구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NLD 한국지부장이 한국 언론과 인터뷰할 때마다 통역을 도맡는 중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번역해 고국에 알리는 일도 해오고 있다.
 
이후 미얀마의 상황은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지난 2015년 NLD의 민간 정부가 들어섰지만 지난해 11월 NLD가 선출 의석 83.2%를 석권하자 군부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지난 2월1일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현재까지 민주화 운동으로 사망한 희생자는 881명으로 추정된다.
 
윈라이 위원장은 "88 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전화도 많지 않고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직접 만나야만 했기 때문"이라며 "지금 세대는 기술적인 면이 훨씬 낫다. 게다가 88년 운동하던 사람들처럼 '우리가 다 죽더라도, 다음 세대라도 군사독재가 180도 뒤집혀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군부는 자신들이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무서워 소규모 시위에도 총뿐 아니라 대포까지 동원하는 것"이라며 "빠른 시기에는 (민주화가) 안될 거 같고, 그렇다고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희망하고 목표한다"고 전망했다.
 
"미얀마 희생 줄이려면 국제사회가 나서야"
 
민주화 운동이 점차 내전으로 번지는 상황에서 다수 민족인 버마족은 오랜 세월 무장 독립투쟁 노하우가 있는 소수 민족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윈라이 위원장은 "군부가 민족간, (민족마다 다른) 종교간 갈등을 조장해왔다"며 "소수 민족이 무장 안할 경우 독재를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버마족이 아니라 군부가 소수 민족과 종교를 탄압하는 것'이라고 알리고 있다"며 "민주 국가가 되면 소수 민족 독립을 얼마든지 다시 논의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얀마 국민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국제사회 도움을 요청해온 윈라이 위원장은 인터뷰 말미에 한국에 대한 고마움을 강조했다. 윈라이 위원장은 "일반 시민, 사회단체,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미얀마 내에서도 다 알고 있다"며 "미얀마인 대부분은 '다시 안정화되면 한국이랑 형제의 나라, 남매의 나라처럼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25일 오전 윈라이 미얀마 군부독재 타도위원회 공동위원장이 인천 부평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밍그라바' 식당 2호점에서 <뉴스토마토>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신태현
 
신태현 기자 htenglis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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