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조재훈 기자] 반도체 시장 내 이른바 '회색시장(Gray Market)'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회색시장은 합법과 불법의 중간에 있는 시장으로 생산업체의 공식 유통채널을 벗어나 물건이 매매되는 통로를 말한다.
반도체 수요는 치솟는데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이 이어지자 '회색시장'에서 정상적으로 유통되지 않은 반도체가 암암리에 거래되면서 시장 질서를 위협한다는 분석이다.
이같은 현상의 중심에는 미국, 중국, 러시아의 암투가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전쟁에 따른 중국 내 칩 재고가 부족하게되자 신생 자동차 기업들이 제품 생산에 필요한 물량 확보전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회색시장은 중국과 홍콩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으로 국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현지 반도체 공급 중단도 중국의 회색시장 거래 규모를 키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4일 블룸버그 등 외신과 업계 등에 따르면 중국 내 반도체 회색시장은 이전부터 존재해왔으나 최근의 반도체 부족 사태로 인해 급격하게 커졌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대표 품목은 MCU(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다. 이 칩은 자동차 엔진과 변속기에서 전기 자동차 전원 시스템 및 충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능을 제어하는데 쓰인다.
회색시장에서 반도체 거래는 브로커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제조사들에 초과 주문을 넣거나 재고 반도체를 합법적으로 판매하는 업체가 이익을 늘리기 위해 생산업체와 계약을 위반하는 방법 등으로 확보된다.
삼성전자 클린룸 반도체 생산현장. (사진=삼성전자)
브로커들은 반도체 칩 판매 수수료를 받거나 사재기해 두고 가격이 오를 때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이익을 낸다. 사재기는 현지에서도 불법인 탓에 단속 대상이다. 회색시장에서 거래는 주로 위챗 메신저나 이메일 등 온라인으로 이뤄지고 때때로 오프라인으로도 거래가 이뤄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브로커가 사재기한 칩을 나중에 얼마나 더 비싸게 파느냐는 운과 풍부한 현금, '관시(특수 관계)' 등에 좌우된다.
브로커들은 이렇게 구한 반도체가 어디서 왔는지 추적할 수 없도록 포장에 있는 라벨이나 정보를 지운다. 폐차된 자동차 부품에서 중고 반도체를 재활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재팬타임즈 등 외신에 따르면 중국의 주요 미국 상장 EV 신생 기업인 Nio, Xpeng 및 Li Auto는 이같은 승인되지 않은 에이전트를 통해 칩 구매를 시도했다. 자체 칩을 생산하는 중국 최대 전기차 제조사 BYD를 제외한 거의 모든 중국 자동차 제조사가 해당 방식으로 반도체 소싱을 시도했다는 전언이다.
이같은 반도체 암거래의 주체는 비단 중국 내 기업 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러시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포착됐다. 러시아 경제지 코메르산트(Kommersant)에 따르면 러시아에서는 지난 3월 이후 중국에서 수입된 반도체 칩의 40%에서 결함이 발견됐다. 이는 미국의 제재가 있기 직전 불량률 2% 대비 급증한 수치다. 다만 이 매체는 해당 중국 공급업체를 지명해 공개하지는 않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국가들의 제재를 받고 있다. 특히 군용으로 쓰일 수 있는 반도체 등 정보기술(IT) 제품 수출 금지에 차량 부품과 가전제품, 군 장비에 들어가는 저가형 반도체부터 첨단가전과 IT 하드웨어 등에 사용되는 고성능 반도체까지 모두 부족한 상황이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지난 3월부터 러시아에 대한 수출이 중단된 상태"라고 말했다.
다만 이같은 반도체 회색시장 문제에 국내 반도체 기업과의 연관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MCU 등은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005930),
SK하이닉스(000660) 등의 기업이 주력하고 있는 반도체는 메모리반도체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재고는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고 가격은 최저치로 떨어지는 '치킨게임'이 발발한 상태다.
업계 관계자는 "암시장 거래는 물건이 부족하지만 구하고 싶은 이들이 많을때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갈 수 있으며 그런 경우에 거래가 발생하는 것"이라며 "재고가 막대하게 쌓이고 가격이 떨어진 메모리를 굳이 암시장에서 살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조재훈 기자 cjh125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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