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전복적인 기타 프레이즈는 흡사 '섬광'처럼 번쩍이는 사막 유령들(곡 '데저트이글' 콘셉트)의 광란. 미지를 향해 다리를 길게 뻗는 이들 고유의 사운드 이제 막 세계로 출항 '돛'을 올렸습니다. '범 내려온다'의 이날치, 얼터너티브 K팝 그룹을 표방하는 힙합 크루 바밍타이거와 올해 3월 홍콩에서 열리는 글로벌 대중음악 페스티벌 '클라켄플랍'을 밟고 세계 무대에 우뚝 섰습니다.
"피닉스, 가디건스, 악틱몽키스, 킹스오브콘비니언스 같은 월드 클라스 밴드부터 아시아 현지 팀들이 서는 국제 무대에서 느껴진 게 많아요. 여러 인종들이 저희들의 노래를 숙지하고 와서 가사를 전부 따라 불러주는 게 보이고 그런 부분들도 신기했어요. 그리고 술 냄새가 아주 대단했지요. 하하."
최근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사옥에서 4인조 록 밴드 ‘실리카겔’ 멤버들, 김한주(키보드·보컬), 김춘추(기타·보컬), 최웅희(베이스), 김건재(드럼)을 만났습니다.
제19회 '2022 한국대중음악상'과 제20회 '2023 한국대중음악상'에서 2년 연속 모던록 노래상을 수상하고, 최근 세계에서까지 주목을 끌어내는 팀. 최근 발표한 EP 음반 'Machine Boy'는 전작들부터 구축한 실리카겔 고유 사운드의 하이웨이와, 새롭게 점멸하는 신 사운드의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올해 3월 홍콩에서 열리는 글로벌 대중음악 페스티벌 '클라켄플랍'을 밟고 세계를 향한 '돛'을 올린 록 밴드 실리카겔. 사진=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클라켄플랍 차 머물렀던 호텔방에서 멤버들, 스탭들과 진지하게 앨범 방향성에 대해 회의하던 기억이 납니다. 수록곡들의 배치와 제목에 대해 얘기를 하다보니, EP 이후 우리가 펼칠 플레이까지도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때 그 호텔방에서 음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요. 그 풍경을 애니메이션으로 시각화한다면, 이번 음반의 컬러와 비슷할 것도 같은데요."(김춘추)
실리카겔의 창작 방식은 네모라기보다는 원. 해석을 각진 형태로 박제하기보다는, 둥글게 흐르도록 놔두는 열린 결말을 중시합니다. 'Machine Boy'라는 앨범명에 대해서도 "완전히 상정하진 않았지만, 상정하지 않은 것도 아닌 캐릭터를 설계했다(김한주)"고 했습니다. 빛과 어둠, 캄캄한 지하실에 유폐돼 꿈을 바라보는 기계소년을 '크로키'처럼만 잡아낸 것. "완결이 될 수 있을지 모르는, '이야기적인 걸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봐주시면 되겠습니다."(김한주) "이야기에 척추를 세워놓고 한다기보다는, 대상이나 존재만을 떠올리고 그걸 표현하기 위한 소리를 만드는 과정인 것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언젠가 또 외전이 나올 수도 있는 거겠죠."(김춘추)
9분짜리 대곡 'Machine Boy 空'은 기계 같은 음성변조와 록 밴드 편제의 합주로 시작하다, 피아노 솔로로 사운드를 미니멀하게 줄이더니, 다시 또 합주로 세를 확장하는 악곡 흐름이 인상적입니다. 일부러 화성도 엇나가는 클래식 계열의 피아노 사운드는 빛과 어둠 속 갈망하는 캐릭터의 자아 투영일까. "연출로 따지자면 이야기적인 느낌이 드는 트랙이죠. 아무래도 곡 제목에 존재가 노골적으로 나와있다 보니까 그런 서사성이 조금 있는 곡이지 않나 생각해요."(김춘추) 제목에만 '공(空)'이 들어간 건 백자 같은 여백의 미학. "캐릭터가 정서적으로 비어있다는 것일 수도 있고, 애매하게 줄타기 하면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담고자 했어요."(김한주)
올해 3월 홍콩에서 열리는 글로벌 대중음악 페스티벌 '클라켄플랍'을 밟고 세계를 향한 '돛'을 올린 록 밴드 실리카겔. 사진=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주도적으로 곡을 쓰는 멤버 한 명이 있고, 편곡 정도에서 밴드가 합을 맞추면서 곡을 만드는 보통의 록 밴드와 이들의 작업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각자 멜로디를 써오고 그것을 앙상블식으로 이어붙이다 보니 전혀 생각지 못한 악곡의 화학작용이 일어난다고. "덩어리처럼 이어 붙여가며 만들 때도 있고, 한 명이 쓱쓱 그려오면 거기에 도움을 보탤 때도 있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해보고 있어요. 어떤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김건재) "주로 한주가 작곡가 역할을 하고 아이디어를 많이 내지만, 곡 만들어 내는 행위에 대해서는 함께 고민해요. 어떤 이펙터를 써볼까, 리듬머신을 드럼으로 어떻게 옮겨볼까, 기타는 어떨 걸 쓸까... 함께 고민하다보면 각자의 악기 성향이 묻어나며 실리카겔 곡이 되는 거라 생각해요."(김춘추, 최웅희)
이번 앨범은 작년부터 비정기 세션을 멤버들끼리 거치며 1~2마디씩 축적한 산물입니다. 올해 초 가평에 위치한 '음악역 1939'에서 3일 정도 녹음(믹싱은 김춘추, 마스터링 필로스플래닛)을 바짝 했습니다.
앨범 첫 문을 여는 'Budland'는 전작들과는 조금 벗어난 형태의 사운드 실험성이 돋보이는 곡. 드럼과 기타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뾰로롱' 대는 전자 사운드는 기존 신디사이저 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에이블톤라이브 DAW('MAX MSP 코딩프로그램' 중 새로운 플러그인)를 활용함으로써 가능했다고. "그 소리를 선택한 시점부터 이 곡의 정체성이 확정됐어요. 다음에 나올 기타 소리도 1~2옥타브 인위적으로 높여 만들었고. 기타와 신디사이저 간 '예쁜 비율'은 늘 숙제인데, 이 곡에서 조금이나마 갈증을 해결한 것 같아요."(김춘추)
올해 3월 홍콩에서 열리는 글로벌 대중음악 페스티벌 '클라켄플랍'을 밟고 세계를 향한 '돛'을 올린 록 밴드 실리카겔. 사진=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타이틀곡 'Realize'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메인 기타 리프를 듣다보면, '데저트 이글'- 'No Pain' 같은 이전 싱글작들부터 이어져 온 실리카겔 고유의 사운드 인장이 서서히 뚜렷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약간 전복적인 이펙터를 걸다 통기타 패턴이 문득 튀어나오는 것도. 가사에 등장하는 웃음과 눈물의 대비, 비관적인 내용의 ‘Mercurial’과 그럼에도 꿈을 바라보는 'Machine Boy', 인상적인 멜로디가 빼곡한 음반을 지날수록 대비적인 서사에 몰입도가 커집니다.
"힘듦을 느끼는 사람들끼리 연결됐으면 좋겠고 사랑을 공유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느 지하 공간 유폐됐던, 비어있는 기계인간이 모든 걸 잃고 세상에 나왔지만, 사랑의 행진에 합류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차갑지만 따뜻한 양가적인 감정을 느껴주셨으면 해요."
2021년 발표한 24분 33초짜리 싱글 곡 ‘S G T A P E - 01’로 "청개구리 한번 돼 보고 싶었다"는 이들입니다. "'언노운 모탈 오케스트라(Unknwon Mortal Orchestra)'처럼 긴 시리즈로 내보고 싶어서 제목에 '01'을 붙이 거예요. 드럼 앤 베이스 시리즈나, 보컬만 나오는 시리즈, 엠비언트 시리즈 같은 걸 구상하고 있어요. '대안적 음악 창구'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올해 3월 홍콩에서 열리는 글로벌 대중음악 페스티벌 '클라켄플랍'을 밟고 세계를 향한 '돛'을 올린 록 밴드 실리카겔. 사진=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이번 앨범을 ‘여행지’에 빗댄다면, 듣는 사람들에게 어떤 공간이면 좋을지,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라기보다는 제게 온 여러 사람들의 피드백인데요. 자전거든 오토바이든 타면서 듣는 분들이 좋았다, 그러면서 힘을 받았다, 말씀들을 해주시더라고요. 질주하는 상황의 어쩌구저쩌구가 아닐까."(김한주)
"저는 오히려 우리 음악이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을 때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분은 좋아지고 피곤해질 수 있음은 주의!"(김건재)
"헬스장 스피닝. 달리는 머신위에서."(최웅희)
"뭐야, 그건 한주랑 비슷하잖아. 하하하"(멤버들)
"아니야. 좀 다르다고. 질주하는 어디라도! 물리적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것뿐 아니라, 작업적 질주를 한다거나."(최웅희)
"그래, 질주할 때!"(김춘추)
올해 3월 홍콩에서 열리는 글로벌 대중음악 페스티벌 '클라켄플랍'을 밟고 세계를 향한 '돛'을 올린 록 밴드 실리카겔. 사진=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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