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문재인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가 진열돼 있다.(사진=연합뉴스)
문재인정부는 미중 갈등이 본격화하는 상황에서도 외교·안보 전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참모인 최종건 전 외교부 1차관(현 연세대 교수)과 대담집 형태로 펴낸 외교·안보 분야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에서 이런 자부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는 균형 외교에서 역대 최고의 성과를 냈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 핵 문제를 핵심으로 한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깊은 회한을 감추지 못했다. 남북 정상회담 3회·북미 정상회담 2회가 상징하는 남북관계 극적 고조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가 보여주는 급격한 퇴조 상황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밝혔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좌초시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2019년 2월 27일~28일) 노딜이 그 배경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노이에서 북한이 요구한 상응조치가 무엇인지 지금도 정확히 몰라"
"우리가 좀 더 개입해서, 북한이 하겠다는 비핵화 조치에 대한 상응조치로 어떤 제재 해제가 필요한지 북한의 요구를 듣고, 합리적으로 판단되면 미국에 전달하는 더 적극적인 중재를 했어야 하지 않는 후회가 있어요. 지금도 우리는 하노이에서 북한이 제시한 조치는 알지만, 상응조치로 무엇을 요구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니까요."
하노이 회담에서 ‘영변 핵단지 폐기’ 카드를 내놨던 북한은 회담이 결렬된 직후, 외무성 리용호 외무상 등이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전면적인 제재 해제가 아니고, 유엔 제재 결의 11건 가운데 2016년부터 2017까지 채택된 5건, 그 중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는 것"이라고 공개했다. 반면 하노이 정상회담 현장 배석자로서 회담 결렬을 주도했던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2020년에 낸 회고록에서 다른 소리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제재의 전면 해제보다는 일부 완화를 요청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고, 만약 그 자리에서 김 위원장이 예스라고 대답했다면 곧바로 거래가 성립되는 것이었으나 김 위원장이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하노이 노딜 직후 남북 정상 번개회담을 제안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생각을 못 했던 것인데, 하노이 회담이 노딜로 끝난 직후에 이번에는 내가 거꾸로 그런 제안을 해봤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남아요."
그래서 그는 "(2019년) 5·26 번개 남북 정상회담 같은 격의 없는 만남이 왜 다시 이뤄지지 않았을까"라는 최종건 교수의 질문에 답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하노이 회담 실패 이유를 김 위원장에게 직접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같은 경우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내세워서 어떻게든 집요하게 UN 안보리 제재의 예외를 인정받았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한스럽기도 하죠."
결국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면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 실패는 더 뼈아플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이 하노이 회담 직전인 2019년 1월 신년사에서 "전제조건이나 대가 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면서 재가동을 위한 문재인정부의 적극적인 의지를 주문한 사안이었다는 점에서, 이후 북한이 남한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지지층 내에서도 최소한 금강산관광 재개는 "미국과 큰 소리가 나더라도 눈 딱 감고 치고 나가야 한다"는 주문이 많았으나,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문 전 대통령은 '하노이 노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북한의 비핵화와 그에 대한 보상이 단계적·동시 병행적이어야 한다는 것에는 트럼프 대통령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미국의 대북정책특별대표 비건이 하노이회담을 앞두고 같은 입장을 밝히는 연설도 했죠. 영변 핵단지를 폐기하겠다, 그것도 미국 전문가 입회하에 미국 기술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내가 2018년 (9·19)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받아왔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조치만 강구하면 훌륭한 딜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딜을 거부하고 노딜로 끝낼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지요."
문 전 대통령은 "우리 고위급 인사가 (1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싱가포르나 하노이 현지에서 대응을 했다면 좋았겠다"는 최 전 차관에게 "진짜 아쉬운 것은 싱가포르 선언의 내용이었다"며 "추상적이고 원론적이었다"고 답한다. "기본적으로 미국이 싱가포르 회담에 임하는 준비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2019년 6월 30일 남북미 판문점 회동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문재인 전 대통령(오른쪽부터), 트럼프 미국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사진=연합뉴스)
"절박하지 않은 미국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는 우리 처지, 참 안타까워"
그는 또 "대화 기간에 북한은 핵과 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고, 미국도 대규모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한다는 것도 싱가포르 선언문에 명시됐으면 좋았을 텐데 구두 약속에 그친 것이 아쉬웠다"고도 했다. 문 전 대통령은 전반적인 미국의 태도에 대해 "(북한의 핵이 멀리 있어) 절박하지 않은 것"이라면서 "그런 미국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가 참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절박하고 문제를 빨리 풀어야 되는 것은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도해서 남북대화를 하고 그것을 통해서 북미 대화까지 이끌어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문 전 대통령은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악화하면서 북한이 자신을 맹비판한 것에 대해서도 쓰린 소회를 남겼다.
"영변 핵단지 폐기까지 결단하고 그것도 미국의 전문가, 기술자와 함께 폐기작업을 하는 진정성을 보여주면 실질적인 비핵화조치라고 미국이 평가할 것이다, 그에 대한 상응조치를 어떻게 얼마나 이끌어내느냐는 두 나라간의 협상에 달렸다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었죠. 결과적으로 그것이 맞지 않은 셈이 됐기 때문에 내가 그때 희망적인 전망을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북한이 원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회고록을 국민의힘 등은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을 떼어 내 정쟁거리로만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넘어진 그 자리 싱가포르와 하노이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문 전 대통령의 말대로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거기서 정상을 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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