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를 의심하라." 만장일치의 차선책, 다수결 원칙. 이 단순한 화두가 2024년 한국 정치 한복판에 떨어졌습니다. 방아쇠를 당긴 이는 171석의 거야를 이끄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 그는 22대 국회 개원 직후 "민주주의 제도는 다수결"이라고 했습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습니다. 분배적 정의가 없는 다수결은 전제 정치의 외피를 쓴 '가짜 민주주의'입니다.
다수가 독점한 전제 정치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와 르완다 내전의 공통점. 왜곡된 다수의 힘이 부른 집단학살(제노사이드). 혐오와 복수심을 앞세운 지배체제가 낳은 비극. 로크 사상 이후 등장한 다수 의사에 대한 정당성은 때때로 인류의 참혹한 상처로 이어졌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아돌프 히틀러는 1934년 나치 독일의 총통 자리에 올랐습니다. 선출된 권력의 힘을 앞세워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했습니다. 1959년∼1996년까지 자행된 소수파 투치족에 대한 다수파 후투족의 학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수결은 때때로 다수의 의지를 배신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가장한 전체주의 본능을 드러냅니다. 이유는 '인간의 이기심'과 '불공정한 게임의 규칙', 이 두 가지가 맞물리면 다수·소수파 간 사회적 자본(신뢰)은 붕괴됩니다. 어떠한 대안도 거부하는 맹목적 합의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다수결=민주주의'는 결코 성립할 수 없습니다.
1951년 케네스 애로(전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의 '불가능성 정리'(어떤 투표도 공정성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연구) 발표 이전, 18세기 '보르다 투표'(1등부터 꼴등까지 점수 부여·미국 메이저리그 MVP 선출 방식)부터 '콩도르세 역설'(투표 순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현상)까지 역사는 늘 다수결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법대로 하자'는 이재명식 정치는 수적 우위를 앞세워 민주주의를 허무는 행위입니다. 다수결 원칙이란 '수단'을 민주주의 '가치'로 혼동한 참극입니다. 선거에서 이겼으니 나를 따르라는, 윤석열정부 종식이란 목적이 정당하니 어떤 수단도 상관없다는 운동권식 계도 정치와 무엇이 다릅니까. 지지층에 맹목적 지지를 요구하는 이재명식 정치는 반대층엔 관습적 굴복을 필연적으로 강요합니다. 패자의 침묵을 강요하는 암묵적 규칙이 우리 사회 전반에 파고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정치적 상상력 꺾는 이재명식 정치
다수결 만능주의의 핵심축은 획일성입니다. 그 자체로 불완전한 제도인 민주주의 가장 큰 매력은 이상향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정신에 있습니다. 민주주의 태동인 고대 아테네. 당시 시민들은 토론을 통해 멈출 수 없는 민주주의 여정에 나섰습니다. 그만큼 다수결의 불완전성은 역사적으로 늘 논쟁거리였습니다. 실제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자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때문에 권력에 대한 무한 독점의 고리를 애초 끊어버렸습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상상력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재명식 다수결 원칙은 정치적 상상력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리걸 마인드(법률적 사고)도 모자라 수학적 셈법이 결합된 최악의 정치입니다. 그 자체로 승자독식 아닙니까. 정치권 안팎의 우려에도 '이재명 맞춤형' 당헌·당규 개정을 시도했던 것도 승자독식 정치 아닌지요. 승자독식의 표본인 다수결 만능주의를 역설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제 타파 등 권력 분산을 주장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양자는 결단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 대표님, 무릇 정치란 '숫자 밖' 예술의 영역입니다. 단순 의석수나 지지율로만 판가름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이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 도전의 미지 영역입니다. 고대 아테네 이후 민주주의가 합의한 최소한의 원칙은 단 하나. 그 누구에게도 '권력의 독점권을 불허했다'는 점입니다. 역사적으로 소수파를 말살한 시대는 머잖아 몰락했습니다. 명분과 실재는 다릅니다. 정치, 그렇게 가벼이 보지 마십시오.
최신형 정치정책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