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는 지금도 말하고 있다>는 영국의 군사학자 사울 데비이드가 쓴 책입니다. 저자는 책에서 세계 각국 30여개의 전투를 분석한 뒤 패배의 원인을 다섯 가지로 지목했습니다. △무능력한 지휘관이 부대를 지휘할 때 △지휘관이 자만심을 가질 때 △작전계획이 잘못 수립됐을 때 △부대의 임무 수행능력이 부족할 때 △정치인이 군에 개입할 때 등입니다.
전투에서 지는 다섯 가지 원인 중 앞의 넷은 순전히 군 자체의 역량 문제입니다. 흥미로운 건 마지막인데요. 정치인이 군에 개입하는 것도 패배의 원인이라고 한 겁니다. 저자는 무능한 군통수권자가 사사로운 이익을 얻려고, 정치인이 특정 목적을 달성하고자 군에 개입하면 치명적 패배로 이어진다고 경고했습니다.
이때 군통수권자가 군에 개입한 결과는 단순히 전투에서 이기고 지는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무능한 지휘관은 한 개 부대를 망가뜨릴 뿐이지만 불순한 동기로 군에 개입하는 무능한 군통수권자는 한 국가를 파국으로 이끕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군 안팎 상황이 간단치 않습니다. 징병제 국가이며, 북한이라는 주적과 주변 4대 강국에 둘러싸여 군사적 긴장감도 높습니다. 군통수권자가 불순한 욕망을 갖고 군에 개입하면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이 직간접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군과 무관할 줄 알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까지 고초를 겪는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느닷없이 책 이야기를 길게 꺼내는 건 윤석열정부에서 군을 두고 벌어지는 상황이 단순 '우려'의 차원을 넘었기 때문입니다.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 고 채수근 상병 순직 사건에 대한 수사 외압 논란 등이 대표적입니다. 여기엔 공통적으로 대통령실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됩니다. 사실상 군에 대한 일련의 개입엔 윤석열 대통령이 뒷배로 작용하고 있는 꼴입니다.
특히 채상병 사건 논란의 진행 과정을 보자면 흐름은 충격적이고, 면면은 나라를 위태롭게 합니다. 대통령이 격노로 출발, 신상필벌이라는 군의 가장 중요한 인사원칙을 훼손하고 군의 사기를 떨어트렸습니다. 결과적으로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을 위해 봉사할,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군을 정쟁의 한 복판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하나회·알자회처럼 정권과 유력인사에게 줄을 서고 작당모의하는 패거리들이 암약할 틈까지 만들었습니다. 각 의혹과 논란에 대해 대통령실과 국방부, 군이 내놓는 궁색한 해명을 듣자면 신념도 철학도 없이 오로지 사적 이익과 정치적 목적에만 골몰하는 모습이 엿보입니다.
물론 정치가 군에 개입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군에 대한 문민통제입니다. 무력집단인 군을 감시하고 견제하려고 정치인이 군 지휘권·인사권에 개입하는 걸 문민통제라고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두 번의 쿠데타와 오랜 군부독재를 겪었습니다. 전두환은 권력을 찬탈하고자 멀쩡한 시민을 학살한 아픈 역사도 있습니다. 군통수권자가 군에 개입하는 건 문민통제를 하려고 할 때만 비로소 명분을 갖고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조차도 절차적 정당성을 엄격하게 갖춰야 합니다.
지금 윤석열정부에 벌어지는 군에 대한 일련의 개입 의혹은 명분도 없고 절차적 정당성도 상실했으며 국민 지지도 잃었습니다. 오히려 속내만 음흉합니다. 대한민국 군을 망치고 있습니다.
최병호 공동체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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