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오후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기념사라기보다는 도발적인 발제에 가깝습니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 19일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평화적 두 국가론-통일 봉인론'을 골자로 한 기념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바람대로 정치권과 남북관계 관련 단체들이 들썩이면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일단 '도발'에는 성공한 듯하나, 우려가 큽니다.
북한은 다음 달 7일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합니다. 김정은 총비서가 올해 1월 시정연설에서 한 개헌 지시에 따른 것으로, 그가 남북관계를 '동족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라고 규정한 '2민족-2국가'론을 최종적으로 제도화하는 자리입니다.
헌법 개정 사항은 '한국 적대국 명기'와 '통일 관련 표현 삭제' 그리고 '영토 조항 반영' 등 세 가지인데, 특히 주목되는 건 영토 조항입니다. 김 총비서는 올해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불법무법의 《북방한계선》을 비롯한 그 어떤 경계선도 허용될 수 없으며 대한민국이 우리의 영토, 영공, 영해를 0.001㎜라도 침범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도발로 간주될 것"이라고 했고, 이어 2월에도 "연평도와 백령도 북쪽 국경선 수역에서의 군사적 대비 태세를 강화할 데 대한 중요 지시"를 내리면서 "우리가 인정하는 해상 국경선을 적이 침범할 시에는 무력 도발로 간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북한은 지난 1999년 서해 NLL(북방한계선)을 부정하며 서해 해상경계선을, 지난 2007년에는 서해 경비계선을 주장했는데, '서해 해상경계선'과 '서해 경비계선' 모두 서해 NLL 남쪽에 경계선을 그었습니다. 북한이 이를 기준으로 '해상국경선'을 선포할 경우 말 그대로 남북은 서해를 무대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2019년 9월 24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무인도인 함박도를 두고 '영토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인천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에서 바라 본 함박도에 북한의 군 시설이 보이고 있다. (사진=뉴시스)
북한 영토 조항 신설·핵 문제 등 심각…'평화적 두 국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시점에서 임 전 실장은 '평화적 두 국가' 주장을 들고 나온 겁니다. 당위론은 있으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극히 어렵습니다.
북한이 '지도부에 대한 공격 임박' 시 사용원칙 등을 법제화한 핵 문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두 국가가 돼도 비핵화를 추진할 수 있겠으나, 조금 더 이해관계가 깊은 제3국이 하는 얘기가 되는 겁다. "국제 사회와 함께 한반도 비핵화 방안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당사자'성이 현저히 떨어진 'N분의 1'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약화되기는커녕, '남한 핵무장' 여론만 강화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남과 북이 법적·제도적으로 '두 국가'가 되는 것이 평화를 보장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두 국가론은 전쟁론이다. 남과 북에서 단독 정부가 수립하면서 한국 전쟁의 길로 갔다"는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특수관계론 자체가 '두 국가론' 기반
임 전 실장은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중 2단계인) 국가연합 방안도 접어두자"고 했지만, 그가 '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특수관계론'(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까지 접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충분히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 간에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와 협력이 일상으로 자리 잡은"상태를 '평화적 두 국가'상태로 규정하면서 그 때까지 "통일 논의를 완전히 봉인하고 30년 후에나 잘 있는지 열어보자"고 합니다.
그런데 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특수관계론 자체가 남북한은 사실상 두 국가라는 현실과 통일지향이라는 이중적 전제로 설계된 것입니다. 두 국가라는 현실 아래 화해·협력과 남북연합(국가연합)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완전한 통일국가로 가자는 것이고, 오랜 기간 적대 관계라는 점을 감안해 화해·협력 단계를 장기간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공동체통일방관과 특수관계론은 통일지상주의가 아닙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정부가 왜 평화만 얘기하느냐, 통일은 포기한 것이냐는 공격을 받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햇볕정책의 설계사' 임동원 전 장관은 "남과 북이 평화공존하며 서로 오고가고 돕고 나누는, 완전통일은 안 되었지만 통일된 것과 비슷한" 남북연합 단계를 '사실상의 통일'로 간주합니다.
임 전 장관의 설명은 이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데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연합 방안을 접어두자고 한다는 점에서 혼란스럽습니다.
'전쟁불사-흡수통일'세력에게 '통일 담론' 뺏길 수도
그는 통일은 우리 세대의 선택지가 아니라 미래 세대가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현 세대에 통일이 어려울 것이라는 데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통일을 '봉인'해 놓으면 후세에 누가 거기에 관심을 가지려 할까요? 오히려 뒷방 오래된 물건 정도로 취급하다가 이사갈 때 내다 버리기 십상일 겁니다.
북한의 '2민족-2국가' 법제화, 제도화가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할 분기점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특수관계론'의 원조인 독일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동독이 1970년대에 헌법과 당 강령에서 통일 조항을 삭제하고, 동독에는 사회주의 민족, 서독에는 자본주의 민족이 존재한다는 '2민족 2국가 노선'을 선언했으나, 서독은 흔들림 없이 '특수관계'론을 유지했습니다. (
관련 기사: 동독도 김정은처럼 '통일'조항 삭제했다…그때 서독은?)
탈냉전기에 모든 정치세력의 총의를 모은 특수관계론은 그 이후 3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한반도 평화와 통일지향의 기둥이었습니다. 자칫 이 기둥을 흔들면 '통일 담론'을 뺏기면서 '전쟁불사-흡수통일' 세력을 막아내기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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