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비상계엄 사태 당시 국회에 투입된 제1공수특전여단 이상현(오른쪽) 여단장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의 긴급 현안질의에 출석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사진=뉴시스)
'12·3 내란 사태'를 추궁한 지난 10일 국회 국방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서 이상현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장(육군 준장)은 계속 오열했습니다.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습니다. 그 내란의 밤에 이상현 여단장은 1공수 병력 277명을 이끌고 국회로 출동했습니다. "국회 인원을 밖으로 내보내라"는 임무가 내려와 처음엔 국회에 테러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국회에 도착한 그를 막아선 것은 전혀 뜻밖에도 평범한 시민들이었습니다. 혼란한 와중에도 그는 시민들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부하들에게 총을 등 뒤로 돌려 메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는 국회 출석에 앞서, 실명으로 언론에 등장해 "우리 부대가 12·12(군사반란 당시 투입)했던 부대의 오명을 씻기 위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다시는 이런 불명예에 주홍글씨를 가슴에 박아도 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내란 주모자들에 대한 원망이자, 어쩌면 인간을 희롱하는 역사의 격랑에 내몰린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한탄이었을 겁니다.
1공수여단 '세 번의 쿠데타'에 모두 동원
그렇습니다. 그의 말대로 1공수여단은 그 독수리 마크에 반란의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는 부대입니다. 1961년 5·16 때는 쿠데타 핵심세력인 박치옥이 부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입, 주요기관을 장악하는 등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1979년 12·12때는 그 유명한 하나회 소속 박희도가 여단장이었습니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무력으로 점거하면서 '전두환 신군부'가 대세를 장악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한국 특전사의 모체라는 자부심을 한 방에 무너뜨리는 흑역사인 셈입니다. 이번에도 강서구에 주둔하는 죄(?)로 가장 먼저 호출대상이 되면서 흑역사를 벗어나기는 커녕, 대한민국 역사상 세 번의 모든 내란에 출동한 부대라는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덮어쓰게 됐습니다.
계엄, 쿠데타라고 하면 한국인들은 우선 전남도청 상공을 선회하는 헬기의 굉음, 일제 사격 소리 그리고 광화문 해태상 앞 탱크를 떠올립니다.
<동아일보>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인 지난 3일 밤 국군정보사령부 특수임무 요원들이 대기하고 있던 경기 성남시 판교 정보사 100여단 사무실에 육군 제2기갑여단 구삼회 여단장도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고 19일 보도했습니다. 2기갑여단은 12·12때 중앙청과 국방부, 육군본부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광화문 해태상 앞에 탱크를 정차시켜놨던 바로 그 부대입니다. '12·3 내란'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45년 만에 똑같은 장면을 지켜봐야 했을 겁니다.
지금 군은 풍비박산입니다. 육군참모총장, 수도방위사령관, 특수전사령관, 방첩사령관, 정보사령관 등 최고위 인사들이 구속됐고, 수사 상황에 따라 구속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은 서울을 두 번 침략했는데, 정착 한국군이 서울을 세 번 쳐들어왔다"는 웃픈 농담이 화제가 될 지경입니다. 오죽하면 역대 내란의 주역들 모두를 배출한 육사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옵니다.
경찰 넘버 1·2, 경찰청장과 서울청장 '동시 구속'
경찰도 대동소이합니다. 헌법에 계엄 해제 의결권이 있는 국회의원들의 국회 진입을 봉쇄한 혐의로 넘버 1·2인 경찰청장과 서울청장이 한꺼번에 구속된 겁니다. 그것도 부하들의 손에 말입니다.
보통 권력기관이라고 하면 검찰, 경찰, 군, 국정원을 꼽습니다. 물리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란이라는 사건의 성격상 초기부터 검찰이 등장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정권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내란이 성공했다면 중·장기적으로 맹활약하지 않았을까요?
지난 3월 14일 당시 홍장원 국가정보원 1차장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가테러대책위원회에 참석해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렇게 보면, 국정원만 폭풍을 피해간 셈입니다. 홍장원 1차장의 공이 컸습니다. 대위 예편 뒤 국정원에 들어와 주로 대북 업무를 한 그는 정부 성향과 관계없이 업무 능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홍 차장 자신이 밝힌 대로 윤석열 대통령은 그를 매우 신임했습니다. 내란의 핵심업무 중에서도 핵심인 정치인 체포를, 외교관 출신인 조태용 국정원장을 제치고 홍 차장에게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정치인 체포 협력 지시를 거부한 그는 "국정원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조직과 인력도 없고 지시를 이행할 수단도 없다"고 했습니다. 공무원이 대통령의 지시 그것도 직접 전화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은 특별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동시에 국정원이 그렇게 바뀌어 있는 상태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2017년 6월 1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은 서훈 국정원장은 국정원으로 오는 차 안에서, IO(국내정보 담당관)제도를 즉각 폐지한다는 지시를 내립니다.국정원내 정부부처 및 각종 기관, 단체, 언론사 출입 담당관을 모두 없애고, 기존 업무 담당자들은 3지망까지 지원 받아서 재배치하도록 했습니다. 국내 정치와 완전 절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김대중·노무현정부도 의지는 있었으나 워낙 그 뿌리가 깊어, 손을 대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서훈, 임명장 받자마자 '국내정부 담당관 폐지' 지시
'5·16 설계자' 김종필은 2015년 회고록에서 자신이 1961년에 (국정원의 모체) 중앙정보부를 만든 이유를 "혁명정부를 뒷받침하는 보조자 역할"이라고 했습니다. 태생 자체가 국내정치용이었다는 고백입니다.
국정원의 IO들은 막강했습니다. 2000년대 초 검찰 담당 IO는 서울지검장 방을 마음대로 드나들었습니다. "서울지검장이 그렇게 막 만나주느냐"고 묻자 "내가 자기 존안파일(대외비 인사파일)을 만드는 데 별 수 없지"라고 합니다. '무소불위 정보부'가 약해지고 약해진 게 그 정도였습니다.
서훈 원장이 2020년 5월에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이동하고, 박지원 국정원장이 뒤를 이어 윤석열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재직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국정원의 국내정치 절연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홍장원의 항명'이 이를 반증합니다.
국정원은 ‘12·3 내란’에서 행한 태도를 앞으로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장담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군과 경찰 지도부가 쿠데타를 주동하거나 적극 협력하고 나설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권력기관들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감시하고 제도적 틀도 보완해나가야만 합니다. 민주주의는 손이 많이 가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습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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