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통화 녹음이 두려운 불신 사회
2024-12-06 06:00:00 2024-12-06 06:00:00
권력층을 둘러싼 통화 녹음 파일이 정치판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등장인물은 대통령과 영부인에 서울시장, 대구시장, 경남지사, 강원지사, 여당 전 대표, 국회의원 등으로 호화찬란합니다. 여야를 넘나들며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여 명성을 떨친 노회한 정치인까지 연루되었다니 놀랄 따름입니다. 하도 많은 인물들이 관련되어 이들의 복잡한 관계를 입체적 그림으로 설명한 언론 기사도 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근엄하고 권위적으로 보이던 높은 분들이 지방의 일개 정치 브로커에게 조언과 지혜를 구하였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대선후보 경선이나 국회의원 공천과 같은 정치적 중대사에 관해 은밀하게 나눈 대화가 녹음을 통해 육성으로 생생하게 들려지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현재 공개된 녹음 파일은 극히 일부라고 합니다. 메가톤급의 파괴력을 띤 진짜 중요한 대화 내용이 담긴 ‘황금폰’이 있다는 소문도 돕니다.
 
논란의 주인공인 정치 브로커가 운영하는 여론조사회사에서 일했던 여직원이 녹음한 파일도 돌아다닙니다. 한때는 같은 편에 섰던 사람들이 이제는 적으로 돌아서 녹음 파일과 녹취록을 이용해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한국적 정치의 이면과 권력의 치부가 백일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유명 정치인들이 얽히고설킨 사연을 들춰내는 녹음 파일은 막장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합니다. 아마도 넷플릭스(Netflix)에서는 이 녹음 파일의 판권을 사서 시리즈로 제작할 계획을 갖고 있을 겁니다.
 
남에게 노출되면 문제가 되는 녹음을 왜 할까요? 사람들이 전화 통화를 녹음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일상생활에서 거래처나 상사와 통화할 때 대화 내용을 사후에 확인하기 위해 녹음합니다. 통화 내용을 흘려듣거나 잘못 들으며 실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하게 업무를 처리하려는 동기에서 통화를 녹음해 기록해 둡니다. 공직 사회에서는 이런 녹음이 담긴 휴대폰이 검찰의 압수수색에 걸려 유죄의 증거로 사용된 사례가 많습니다. 그래서 공직자들은 일년에 한 번씩 휴대폰을 바꾼다고 합니다.
 
증거로 보관하기 위해 특별히 의도를 갖고 녹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녹음 파일을 증거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대체로 개인 간 금전 대차거래에서 차용증을 쓰기 어려우면 그 증빙으로 대화 내용을 녹음해 두는 겁니다.
 
불법 행위에 연루될 경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상대방의 비리를 제보할 목적으로 녹음하기도 합니다. 양심적 고발자의 신분으로 녹음 파일을 사법 당국에 제출하거나 언론에 공개합니다.
 
불순한 의도를 갖고 협박용으로 녹음하기도 합니다. 비리나 부정에 관해 대화를 나눈 통화를 녹음하고 나중에 이를 이용해 보상을 얻어내고자 합니다. 통상적으로 종범이나 조력자가 주범을 협박해 큰 보상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녹음 파일을 사용합니다.
 
아주 특이하고 드문 동기가 과시용입니다. 유력 인사나 권력자와 친밀한 관계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비밀스런 대화를 녹음해 들려줍니다. 이번에 사건이 터진 단초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치 브로커가 자신의 위세를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녹음 파일을 틀어주었는데 그걸 다시 누가 녹음한 파일이 공개되며 주목을 끈겁니다. 본인은 상대방 몰래 녹음해 놓고 이를 동네 방네 떠들고 다니는 가운데 자신의 말이 다른 사람에 의해 녹음되고 촬영되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더욱이 가장 가깝게 일한 여직원이 그 대화를 죄다 녹음해 야당에 제보할 줄은 몰랐습니다. 녹음파일로 흥한 자 녹음파일로 망한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녹음은 가까운 사람이 합니다. 서로 전화번호를 알고 통화하는 사이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3자가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통화 내용을 녹음하는 것은 합법입니다. 상대방에게 통화가 녹음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아도 됩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에 자동녹음 기능이 있어 누구와 통화하건 다 녹음이 됩니다. AI통화앱이 탑재된 폰에서는 녹음 내용을 녹취록으로도 만들어 줍니다. 메모리 용량이 커서 일상적 통화를 다 녹음해 둘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전화 통화할 때 그 대화가 녹음되고 있다는 전제 하에 말해야 합니다. 절대로 속 마음을 털어 놓거나 흠이 될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안심하고 할 말 안할 말 다 늘어놓으면 나중에 곤욕을 치룰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가 얽히거나 부적절하고 부당한 주제에 관해 통화할 때는 더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참 어쩌다 녹음될 것을 걱정하며 통화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기술이 발달하면 상대방의 녹음을 방해하는 소프트웨어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상대방이 통화 내용을 녹음하면 그 사실을 알고 경고해 주거나 상대방 휴대폰의 녹음 파일에 잡음을 섞어 음성을 못 알아듣게 만드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 대박을 터뜨릴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말 조심하고 살아야 안전합니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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