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입사 직전, 1년 6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혼자 다니다 보니 여러 고난이 있었습니다. 인도 숙소에서 자는 동안 숙소 종업원에게 가방을 도둑 맞아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적도 있고 영국에서 정신 착란 증세가 있는 집주인의 위협에 피신한 적도 있고 네팔에서 히말라야를 오를 땐 고산병에 걸려 중도 포기할 뻔도 했습니다. 당시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경험이 인생의 참고서가 됐습니다. 새로운 경험, 특히 고난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줬습니다.
그 경험을 비춰봤을 때, 윤석열 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야겠습니다. 윤 씨는 대통령 임기 내내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가깝게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중무장시켜 국회에 투입했고 내란을 꾀했습니다. 비상계엄을 해제할 수 없도록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내라는 지시도 했습니다. 이보다 명확한 헌법 유린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고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아 체포영장이 발부된 최초의 현직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 와중에 자신은 떳떳하다는 편지를 지지 세력에게 보냈습니다.
법과 상식에 맞지 않는 일들의 연속입니다. 전례 없는 일들은 우리 사회에 연일 충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은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온 국민을 초대했습니다. 마치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시기 온 국민이 문제를 풀 듯, 우리 사회 구성원은 각자 나름의 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정치 관심도가 떨어진다는 20~30대 젊은 세대도 동참했습니다. 그 결과 2024년 12월14일 국회 앞엔 윤 씨의 탄핵을 바라는 200만 시민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우금치 전투에 비견되는 남태령 시위까지 이어졌습니다. 윤 씨가 버틸수록 우리 사회가 내놓는 해법은 진화할 겁니다. 다시 생각합니다. 윤 씨는 '민주주의적 논개'가 아닐까. 자신을 '희생'해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줬으니까요.
내란 수괴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내란은 종결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겁니다. 하지만 믿습니다. 우리나라 시민들께서 지켜보고 있는 한 지금의 혼란한 상황이 순리대로 해결되리라는 것을요. 나아가 기대합니다. 우리 사회는 앞으로 어떤 사회도 가지지 못했던 성숙한 민주주의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요. 다른 나라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고난을 뛰어넘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그날'이 올 때 다시 외치면 어떨까요. 윤석열, 고맙다.
여행하면서 어려움을 겪었을 때마다 힘이 되어준 건 주변 사람들이었습니다. 범인으로부터 여권을 되찾아준 한국인 형님, 흔쾌히 방 한 칸을 내어준 영국인 가족, 고산병에 좋은 약을 한 움큼 쥐여준 한국인 약사분까지. 혼자 힘으로 이겨냈던 역경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는 서로 기대고 응원해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현광 정치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