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진아·유지웅 기자] 지난달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환율 방어를 위해 시장에 투입되면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이후 최대 감소 폭을 기록했습니다. 구조적 요인으로 고환율 흐름이 굳어지는 추세인 가운데, 외환당국의 환율 개입이 반복되면서 외환보유액 운용 부담도 누적되는 양상입니다. 현재까지 원화 자산 선호를 회복시키거나 외환시장 수급 구조를 바꾸는 중장기 해법은 아직 뚜렷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향후 미국과의 관세 협상으로 대미 투자금이 매년 200억달러 상한으로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근본적인 처방이 없다면 한국의 외환시장 방어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환율 방어'에 외환보유액 7개월 만에 감소 전환
6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4280억5000만달러(약 618조원)로, 전월보다 26억달러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감소 폭은 역대 12월 기준 두 번째로 큰 것으로, 외환위기가 있었던 지난 1997년 12월 기록한 40억달러 감소 이후 28년 만에 최대 규모입니다.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5월 말 5년여 만에 가장 적은 수준인 4046억달러로 줄은 뒤 6개월 연속 늘다가 이번에 7개월 만에 재차 감소한 것입니다.
통상 12월은 금융기관이 국제결제은행(BIS)의 자본 비율을 맞추기 위해 외화예수금을 중앙은행에 쌓는 시기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외환보유액이 늘어나는 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지난달 이례적으로 외환보유액이 크게 감소한 것은 연말 고공행진하는 원·달러 환율을 낮추는 과정에서 사용된 것으로 분석됩니다.
한은은 "분기 말 효과에 따라 금융기관 외화 예수금이 증가하고 유로·엔 등 기타 통화 외화 자산의 달러 환산액은 늘었으나 외환시장 변동성 완화 조치가 외환보유액 감소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난해 9월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간 이후 연말까지 고환율이 진정되지 않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외환보유액의 달러를 썼고 이 떄문에 잔고가 감소했다는 의미입니다.
외환당국의 개입 전 1484원이었던 원·달러 환율은 4거래일 만인 지난달 30일 1439원으로 연말 거래를 마쳤습니다. 당국의 적극적 개입으로 환율을 약 45원 끌어내렸지만, 반대급부로 외환보유액은 역대급 감소세가 나타난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 규모는 2025년 11월 말 기준으로 세계 9위 수준입니다. 국가별로 보면 중국이 3조3464억달러로 가장 많고, 일본 1조3594억달러, 스위스 1조588억달러, 러시아 7346억달러, 인도 6879억달러, 대만 5998억달러, 독일 5523억달러 등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근본 처방 없이 단기 대응만…'일시 안정→재상승' 고착
그간 외환당국의 환율 대응은 단기 변동성을 눌러 관리하는 데 집중됐습니다. 급등 국면마다 시장 개입에 나서는 방식이 반복되면서 환율 흐름은 '일시 안정 이후 재상승'이라는 패턴으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연평균 원·달러 환율은 주간 거래 종가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연말 종가는 1439원으로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1695원)과 내란 사태를 겪은 2024년(1472.5원)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연말 종가 마감을 앞두고 국민연금은 대규모 환 헤지를 했고, 외환당국도 "정부의 강력 의지와 정책 실행 능력을 곧 확인하게 될 것"이라며 이례적으로 강한 메시지를 내놓았습니다. 연말 종가가 기업과 금융기관의 외화 부채를 계산하는 '결산 기준 환율'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구두개입과 실개입이 병행되면서 최근 환율 급등세는 다소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방식의 관리가 외환보유액 소모를 전제로 한다는 점입니다. 단기적으로는 환율 급등을 완화할 수 있지만, 고환율 국면이 장기화할수록 개입 빈도와 규모는 함께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 따라 당장 올해부터 내기로 한 연간 200억달러를 상한의 대미 직접투자금은 부담을 더합니다.
정부는 이르면 1월 말 달러 표시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발행에 나설 계획입니다. 외환시장 실개입으로 줄어든 외환보유액을 차입으로 보완하는 동시에, 국가 신인도를 재확인하려는 조치로 해석됩니다. 다만 외평채는 외환보유액을 늘리는 수단이 아니라 시간을 버는 대응입니다. 결국 환율을 누르는 동안 정책 여력은 점진적으로 줄어드는 셈입니다.
1400원대 환율이 '뉴 노멀'(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이런 기조가 근본적인 방향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국민연금 환 헤지 등을 통한 '실탄'이 수개월 내 소진될 수 있기 때문에 이후 환율이 다시 상승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원화 자산 기피 현상의 배경으로는 '국내 유동성 확대'가 지목됩니다. 시중에 풀린 돈이 일부 자산가의 부동산 가격만 끌어올린 반면, 현금·예금 등 원화 자산을 보유한 계층의 실질 가치 하락 체감은 커졌습니다. 이 과정이 해외 자산과 달러 선호 확대로 이어졌다는 분석입니다.
국제기구가 제시하는 적정 원·달러 환율과의 괴리는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IMF는 적정 수준을 1330원선(2024년 기준)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올해도 환율이 1400원대에서 등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적정 수준까지 내려가기 위해서는 외환시장 개입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며, 결국 수급 구조 자체를 바꾸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반면 통화당국 수장인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고환율 배경으로 국내 기관을 중심으로 한 환율 상승 기대를 지목하며 "기대를 관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지난달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이 7개월 만에 감소한 가운데, 6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박진아 기자 toyouja@etomato.com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