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옳은 일을 하다가 파멸한다면, 그래도 그 일을 하겠는가?
이 질문에 선뜻 ‘아니’라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은 어떤 상황 앞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러나 파멸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직장을 잃고 가족이 위험에 처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워지는 구체적 현실로 닥쳐올 때, 과연 같은 대답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영화 <두 검사>는 바로 그 질문을 1937년 스탈린 숙청기의 소련이라는 극한의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이 영화는 불편하다. 잔인한 처형이나 고문의 장면, 극한 갈등이 없는데도 그렇다. 대신 1.37 대 1의 좁은 화면비는 관객의 시야를 조여 오고, 느리게 흐르는 서사는 당시 소련 사람들이 매일 숨죽이며 견뎌야 했던 그 시간의 무게를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카메라는 주인공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 담긴 미세한 갈등과 공포와 결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감독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영화 속의 감옥은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실제 옛 감옥이었고, 검찰총장으로 나온 비신스키는 스탈린 대숙청 시기에 모스크바 공개재판에서 수석 검사로 활동하며 혁명 원로들을 처형한 실존 인물이었다. 감독은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의 수감자였던 게오르기 데미도프의 원작소설을 스크린 위에 더욱 사실적으로 그려 넣었다.
중요한 것은 이 불편함이 영화가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영화가 끝난 뒤 진짜 불편함이 시작된다. 결말이 주는 슬픔이 아니다. 역사에 대한 연민도 아니다. 이 묵직하고 갑갑한 감정은 이 영화가 단지 소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자각에 기인한다.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각성의 괴로움이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도 정치권력과 검찰권력의 유착으로부터 많은 희생을 치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었다. 최근의 계엄 선포와 그 실패, 탄핵 정국 속에서도 두 권력은 이별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영화 속 두 검사를 허구의 인물로 볼 수 없다. 권력의 의지에 복종하며 그것을 ‘법 집행’이라 부르는 자들과, 그 안에서 원칙을 지키려다 소외되고 짓밟히는 자들의 대비는 지금 이 시대의 풍경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스탈린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총살 대신 인사 불이익이 있고, 강제노동 대신 여론의 낙인이 있다. 작은 틈새를 비집고 터져 나온 양심마저 쉬이 왜곡되어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하는 것조차 어렵다. 옳은 말을 하면 고립되고, 권력에 아부하면 살아남는 그 구조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영화 <두 검사>는 1937년 스탈린 대숙청 시기 본격적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면서 방해 세력을 제거하던 때를 다룬다. (사진=엠엔엠 인터내셔널)
우리는 주인공이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세상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도 잘 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생각하기를 멈춘 자들’만이 아니라 ‘생각이 많은 영악한 자들’ 역시 괴물이라는 사실도 안다.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자유가 주는 고독을 감당하지 못하고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그 불안을 해소하려 드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집단에의 소속이 주는 안정감은 개인의 도덕감을 곧 무력하게 만들 만큼 강력하므로.
그래서 영화는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그저 무수한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워놓는다. 너였다면 어느 검사이기를 선택했겠냐고. 스탈린이 없어도, 총구가 없어도, 매일 크고 작은 선택들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침묵할 것인지, 말할 것인지, 줄을 설 것인지, 홀로 설 것인지를 조용히 묻는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옳은 일을 하다 파멸한 자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는가. 아니다. 그들이 남긴 질문이 지금 우리를 이토록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불편함을 느끼는 한,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
이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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