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재벌그룹들이 투자계획 규모를 놓고 대정부 눈치보기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삼성그룹은 올해 투자계획을 대외에 공표하지 않기로 했다. 경영환경을 둘러싼 대내외적 불확실성이 증대됨에 따라 '유연한 대응'을 기본방침으로 정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최근 <뉴스토마토>와 만난 자리에서 "별도의 투자계획 발표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고위 관계자는 "'탄력적 대응', '신축적 운영'에 함의된 바를 보면 된다"고 부연했다. 'NCND'(긍정도 부정도 않음)로 일관하다 어렵사리 내놓은 대답이었다.
그는 "굳이 투자계획 발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는 상황이 됐다"며 "여러모로 난처한 게 사실"이라고 내부상황을 전했다.
실제 삼성 속내는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 경제위기 극복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내건 박근혜 정부의 눈살 또한 좋을 리 없다. 직간접적 채널을 통해 사상최대 50조원 투자를 기대했던 청와대 표정이 벌써부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자칫 경제민주화 바람에 재벌개혁으로 정책기조를 고쳐 잡을 경우도 삼성으로선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여당 고위 관계자는 11일 "삼성이 투자계획 발표를 늦추면서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며 "투자와 고용은 기업 본연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는 "모두가 어려울 때 대기업이 나서줘야 하는데 삼성이 주저하면서 다른 대기업들도 눈치를 살피고 있다"며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무게를 실었다. 삼성으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삼성전자 '고민, 고민, 고민'..전체 투자계획도 지연
새 정부 출범 초기임에도 삼성이 투자계획에 미연적인 이유는 분명 있다. 우선 그룹 전체 투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온 삼성전자의 변동성이 너무도 크다. 칼로 무 배듯 단 번에 결정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란 얘기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47조8000억원의 투자계획을 내놨으며, 이중 전자는 25조원 규모를 담당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설비투자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올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최근 3년간 40조원을 쏟아 부으며 반도체 설비투자를 마무리 지은 데다 경쟁사 간 극한으로 치닫던 '치킨게임'도 막바지에 달했다.
전동수 삼성전자 DS부문 메모리사업부장(사장)은 지난 8일 기자들과 만나 "투자계획은 정해지지 않았다"며 "2분기 스마트폰 가수요가 있을 수 있어 투자는 무빙타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진성 수요가 확인될 경우 빠른 의사결정을 통해 투자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디스플레이는 사정은 더 복잡하다. 수율 한계에 직면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양산 방식을 기존 RGB(적·녹·청)에서 WRGB(백·적·녹·청)로 전환, 기술적 난제를 풀어나가는 게 최적의 답안이라는 것은 삼성도 인지하고 있다.
다만 이 경우, LG 방식을 뒤늦게 따라가는 꼴이 되면서 삼성으로선 자존심에 상처가 나게 된다. 결국 8세대 라인 양산 방식이 결정되지 않으면서 투자계획 또한 무기한 보류됐다.
양대 설비투자가 정해지지 않으면서 삼성전자의 모호성도 덩달아 커졌다. 삼성전자가 지난 1월25일 2012년 4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경영 불확실성이 높은 환경을 감안해 올해 시설투자는 글로벌 경기, IT 수요 회복과 수급 전망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상황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할 예정"이라고만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주력사인 전자가 설비투자에 대한 답을 명확히 내놓지 않은 상황에서 전체 투자계획을 수립하기가 여의치 않다"면서 "설비 없이 연구개발(R&D)만으로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규모에 있어서 설비는 여전히 투자의 절대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래 중장기적 경쟁력과 핵심기술 확보를 위한 R&D 투자는 지속적으로 과감하게 추진할 예정"이라면서도 정확한 규모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역풍 우려 '몸 사린다'..M&A는 관전포인트
또 다른 요인도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다. 삼성그룹 한 관계자는 대내외적 신인도를 변수로 들었다. 그는 "사실 내부적으로는 (계열사별로 투자계획이) 취합이 됐다"면서도 "다만 변동성이 커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이 관계자는 "가령 정부 기대대로 50조원 계획을 내놓더라도, 여러 가지 변수로 집행률이 크게 못 미쳤을 경우 또 삼성 탓을 할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집행률이 당초 계획보다 크게 뒤떨어질 경우 삼성에 융단폭격을 가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재벌그룹의 거짓말로 비화할 경우 가해질 여론의 비난은 경제민주화 수위를 높일 수밖에 없다는 우려다. 자연스럽게 삼성에 대한 정부의 불편함이 커지고, 장비산업 등의 침체 원인도 삼성에게서 찾을 것 아니냐는 얘기다.
때문에 이 관계자는 "허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중한 대응=무공표'란 공식이 수립된 셈이다.
삼성의 덩치가 커지면서 치열해진 글로벌 경쟁사들과의 정보전도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삼성 관계자는 "투자계획을 내놓으면 대략 어디에 집중할 지가 눈에 들어온다"며 "이는 전략노출과도 같다"고 강조했다. 경쟁사로서는 삼성의 패를 읽고 맞춤형 대응 전략 수립이 가능해진다는 설명이다.
특히 지난해 애플과의 특허전이 불거지는 등 한바탕 홍역을 치른 상황이어서 매 순간 언행이 상당히 조심스러워졌다. 관련기술 확보를 위한 인수합병(M&A) 자금도 따로 챙겨놔야 한다. 이는 전자뿐만 아니라 신수종 사업에 해당하는 바이오제약 등도 마찬가지다.
앞서 윤부근 삼성전자 소비자가전(CE) 담당 사장은 올초 CES 참석 직후 가진 국내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사업을 하는데 있어 우리 전략에 맞아 떨어지거나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 인수할 수 있는 준비는 하고 있다. 또 사업하면서 당연히 그런 게 뒤따라야 한다"면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머릿속에 몇 개 있다. 서류가 넘어온 것도 몇 군데 있다"고 말했다.
삼성은 지난해 47조8000억원의 투자계획을 내놓으면서 31조원을 시설투자에, 13조6000억원을 연구개발에 투입한다고 밝혔다. 나머지 3조2000억원은 자본투자 항목으로 구분됐으며 이는 인수합병 등에 사용했다. 인수합병의 특성상 최종계약이 무산될 경우 결국 자본투자는 '0'이 된다.
대신 삼성은 오는 13일 채용계획을 발표하며 고용 창출에 안간힘을 쓸 계획이다. 삼성은 지난해 수준(2만6100명)의 채용규모를 확정하는 한편 지방대와 저소득층, 고졸 출신 등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를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열린 채용에 대한 유지와 함께 준법경영을 강화해 미진한 투자를 메운다는 전략이다. 정부와 여론을 의식한 결과다.
한편 한화그룹 또한 삼성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투자계획 발표 없이 시나리오 경영에 돌입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글로벌 경기 등 불확실성이 커 맞춤형 시나리오 경영으로 전환했다"며 "투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집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현재 10대 그룹 가운데 올해 투자계획을 내놓은 곳은 SK, LG, GS 등에 불과하다. 이중 SK는 최태원 회장의 구속이, GS는 허창수 회장의 전경련 회장 연임이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LG만이 지난 1월 재벌그룹 가운데 가장 먼저 투자계획을 내놓으며 공격적 경영 기조를 이어나갔다. LG는 시설부문 14조원, 연구개발 6조원 등 총 20조원을 올해 투입한다. 이는 전년도 투자액 16조8000억원에 비해 19.1% 늘어난 규모로 사상 최대다.
◇서울 서초동 삼성타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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