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2차 대전 종전 70주년 담화를 앞두고 치열한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베 담화에는 전임 총리들의 담화에 담겼던 ‘침략’ ‘식민지’ ‘반성’ ‘사죄’ 등 4대 키워드가 다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 확실시된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일본은 담화 발표 후의 대 중국 관계는 고려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다.
일본의 집권세력은 2차 대전 당시의 ‘가해’ 사실에 물타기를 시도하며 1995년 무라야마 총리가 발표한 담화 내용을 아베 담화에 다 넣을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자민당에 설치된 '일본의 명예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특명위원회'는 지난 28일 아베 총리를 만나 위안부 문제 등에 관한 국제사회의 오해를 풀도록 일본 정부가 메시지를 적극 보내야 한다는 제안서를 전달했다. 제안서에는 1993년 고노 관방장관이 담화를 발표한 뒤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강제 연행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사실에 반하는 인식을 국제사회에 확산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전해진다. 특위는 또 서구 학자의 영향력을 빌려 정부의 견해를 알리거나 인터넷·출판물로 홍보하는 방안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는 “똑똑히 받아들이겠다. 잘못된 점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화답했다.
우익 시민단체들도 아베 담화를 앞두고 공격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의 민간단체들은 30일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를 방문해 중국이 위안부 및 난징학살 관련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신청한 것은 날조된 자료를 토대로 이뤄졌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앞서 27일에는 일본의 우익 사회단체들이 스위스 제네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준비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해 일본은 위안부를 강제 연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일본 <TV아사히>는 25일 태평양전쟁 일본인 A급 전범들을 단죄한 극동군사재판은 전승국의 입장에서 부당하게 운영됐다고 지적하는 내용의 교양 프로그램을 내보내기도 했다.
일본 집권·우익세력의 이같은 움직임에 반대하는 한국과 일본, 미국, 유럽 등 세계 지식인 524명은 29일 아베 총리의 위안부 문제 인식과 과거사 왜곡을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측 382명을 비롯해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와 우쓰미 아이코 와세다대 교수 등 일본측 105명,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와 노엄 촘스키 MIT 명예교수 등 미국측 22명, 유럽측 15명 등이 참여한 이 성명은 “(아베는)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아시아의 근린제국에 엄청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진정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표명하라”고 요구했다. 이날에는 일본 도쿄에서도 아베 담화에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담으라고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미국에서는 연방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채택 8주년을 맞아 일본의 과거사 부정을 비판하는 기념식이 28일 열렸다. 결의안을 주도했던 마이크 혼다(민주·캘리포니아) 의원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지난해 방한 때 위안부 문제를 언급했고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성노예'라는 표현을 쓴 점을 상기하며 “일본인들이 일본 정부나 아베 총리를 향해 옳은 일을 하라고 요구해야 한다는, 일본인들에 대한 메시지"라고 강조했다. 아베의 역사관에 시종일관 비판적이었던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도 담화를 앞두고 아베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사설을 게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세계 시민사회나 미 의회의 이같은 입장이 아베에게 실질적인 압박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한·미·일 3각 공조를 조속히 구축해 중국을 견제·포위하는 정책을 최우선에 두고 있는 미국 정부가 아베의 ‘탈선’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미국을 방문해 29일 만난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의 태도는 미국 정부의 속내를 그대로 보여줬다. 러셀 차관보는 김 대표가 “아베 총리가 8·15 기념사에서 역사 왜곡을 하지 말라고 미국도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하자 “한국에는 미국이라는 친구와 자유시장을 가진 일본이 있다”며 “한국의 지위는 '글로벌 이슈'에서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집권당 대표의 요청에 제대로 응대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입장만을 강조한 것이다.
일본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아베 담화에는 ‘침략’은 들어가지만 ‘식민지배’는 빠질 것으로 보인다. 아베 담화 자문기구인 ‘21세기 구상 간담회’ 위원인 가와시마 신 도쿄대 대학원 교수는 지난 24일 외신간담회에서 “일본의 대다수 역사 연구자는 어떻게 보더라도 ‘침략’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달리 말해, 중국에 대한 사과성 발언은 하지만 한국을 식민지배한 데 대한 사과는 안 한다는 뜻이다. 중국과 한국의 틈을 벌려 대 일본 공조를 차단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지난 24일 일본 기업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2차 대전 기간 강제노역한 중국 노동자들에게 사죄·보상하기로 한 반면 한국측 강제노역 피해자들은 외면해 버린 것은 일본 정부의 전략과 맞닿아 있다.
담화를 발표한 후 아베 총리는 9월 초 중국을 방문해 중·일 관계의 회복을 꾀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제관계 전반을 개선하기로 결정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구상과도 조응할 수 있다. 아베의 ‘한·중 분리 대응’ 전술에 대응하지 못한 한국이 외교적 고립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황준호 기자 jhwang7419@etomato.com
독도아카데미 회원들이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광복 70년을 맞아 아베 정부의 역사 왜곡 반성을 촉구하는 침묵시위에 앞서 일제에 희생된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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