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규칙·통상해고(일반해고) 지침과 관련해 노동계와 충분히 협의하겠다던 정부가 또 다시 ‘민간기관의 설문조사 결과’를 활용한 여론전 카드를 빼들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2일 한국인사관리학회가 현대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5일부터 3일간 19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양대 지침 관련 인식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0%p)’ 결과를 배포했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55.9%는 ‘임금피크제 도입 시 근로자 고용연장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답했고, 70.0%는 ‘취업규칙 변경의 요건·절차 마련’에 동의했다. ‘저성과자에 대한 개선기회 부여 후 계약해지 등 인사관리 방안’에는 71.1%가 찬성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의 객관성에는 물음표가 따른다. 일부 질문이 ‘찬성’ 답변을 유도하게끔 설계됐기 때문이다. 일례로 취업규칙 지침의 최대 쟁점은 ‘근로자 과반의 동의 없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허용’인데, 관련 질문은 ‘임금피크제 도입 시 취업규칙 변경의 요건과 절차를 명확히 하는 방안에 동의하십니까?’였다. 저성과자 해고 관련 문항에도 ‘쉬운 해고로 악용될 수 있다’는 노동계의 우려는 반영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여론조사는 응답자들이 무엇에 찬성했는지 불분명할뿐더러, 오히려 ‘국민 대다수가 양대 지침에 찬성한다’고 오인될 소지가 크다.
보다 큰 문제는 조사의 형식과 책임성이다. 이번 조사는 고용부의 후원으로 한국인사관리학회가 현대리서치에 의뢰해 진행됐다. 지난달 7일 한국노동경제학회의 ‘기간제 근로에 대한 인식조사’ 자료를 ‘대리 배포’해 비판을 받았던 고용부가 이번에는 ‘후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고용부는 이번 여론조사의 비용을 대고 질문지 작성에 직접 관여했음에도 의뢰기관명에서는 빠졌다. 이로 인해 조사의 신뢰성과 관련한 책임소재도 모호하게 됐다.
이를 놓고 노동계에서는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민간학회의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노사정위원회에서 실시하기로 했던 비정규직 실태조사도 문항 문제로 무산됐다. 문구 하나에 여론조사 결과가 달라질 정도로 문항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는 민감한 문제”라며 “그런데 지금처럼 왜곡이 심각한 여론조사 결과를 학회 명의로 발표하는 건 자기들이 차마 할 수 없으니 돈으로 명분을 사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세종=김지영 기자 jiyeong8506@etomato.com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달 30일 세종로 서울정부청사에서 열린 고용노동 현안 정책자문단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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