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월요일 제69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이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 참석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추념식과 상관없는 연설을 늘어놓아 유족과 추모객들을 실망시켰고, 대선 주자들과 여·야 정당 지도부는 선거 후에도 과연 4·3문제 해결을 위해 제주를 방문할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4·3특별법'이 제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4·3학살을 자행한 국가공권력의 과오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공식적인 사과를 했지만, 그 외에 제주 4·3을 기억하고 찾아온 역대 대통령들은 물론 없었다.
4·3에 대한 역사교육의 부재
제주도민을 제외한 국민의 몇 퍼센트가 4·3항쟁에 대해 알고 있을까? 나아가,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든 것은 제주도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4·3에 대한 질문을 했다가 모른다는 답변을 계속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늘 절감하는 우리의 역사교육의 문제겠으나, 5·18광주항쟁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1947.3.1.기점, 1948년4월3일~1954년9월21일) 섬 전체가 거의 초토화될 정도로 학살의 희생자들을 낳고 수십 년간 침묵을 강요당해 온 한국현대사의 비극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4·3항쟁 69주기를 맞아 제주4·3평화공원 내 기념관을 찾은 일본인 단체방문객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니 더욱 그러하다. 4·3때 학살을 피해 제주에서 건너간 재일교포의 후손들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룹의 안내자는 교포도 있지만 대부분 한반도의 분단과 4·3이 궁극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비롯되었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일본인들이라고 설명했다. 매년 이 방문을 조직해 온 출판사 신간사(新幹社)의 고이삼 대표는 제주출신 부모를 둔 재일동포 2세로, 4·3에 관련된 도서들을 많이 출판해왔고 1986년 '탐라연구회'를 시작해 1988년부터 일본에서 4·3 추모행사를 진행해 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도 징용 등으로 인해 일본에 건너간 제주도민들이 많았으나, 4·3이후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 밀입국한 제주도 출신의 재일동포는 3~4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일동포의 많은 수가 제주출신이고 4·3의 비극이 재일동포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 하겠다. 4·3평화기념관 전시실 초입에는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채 백비(白碑)로 남아 있는 비석,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가 누워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3월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제주도를 결전지로 이용하려는 결(決)7호 작전을 결정하고 일본군 7만 명을 제주도에 배치한다. 당시 제주도민은 22만 명이었다.
제주도에는 젊은이가 거의 없다
징병으로 가고
먼 탄광으로 가고
남양군도 징용으로 갔다
바닷가 마을마다
20명
30명이 무더기로 갔다
18세부터 30세까지
한 마을에서
25명이 갔다
< … >
남은 사람들
열네살짜리부터
칠십 노인까지 동원되어
노역 기간
1백명씩
2백명씩 ‘함바’에 수용되었다
일본 패전 뒤
그 함바에는
시체 3백여구
이것이 해방이었다
이것이 해방의 제주도였다
끌려간 젊은이들 절반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 … >
제주도 중산간 봉개동
임경복이는
아버지 임창호의 시신 못 찾았다
세 군데 함바 다 뒤졌지만
그 주검들 속
아버지의 주검 못 찾았다
엉엉 울며
아버지의 옷 한 벌 태워
그 재로
아버지 무덤을 썼다
1945년 8월 17일
해방된 이틀 뒤
8월 15일 해방된 날
그날을
아버지의 제삿날로 삼았다
아버지
아버지
하고 무덤 쓴 뒤
돌아오며
수평선에 대고 불러보았다
그날밤 꿈속
아버지가 배를 타고 돌아왔다
(‘임창호 씨 제삿날’, 20권)
제69주년 4.3희생자 추념식 위령제단 앞에서 추모하는 유족들과 참배객들의 모습. 사진/필자 제공
4·3학살의 목적
제주도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지부는 1945년 9월 22일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는데 1947년 3월까지 공식적인 조직으로 활동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항일투쟁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좌우익이 함께 참여한 조직이었으며 제주도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미군정의 미곡정책 실패, 친일경찰의 군정경찰화, 군정관리와 모리배의 결탁 등으로 인해 고통을 겪던 민중들은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단독선거에 반대하게 되는데, 제주도민 역시 단독선거는 분단으로 가는 길임을 자각하고 이에 대항해 1948년 4월 3일 항의시위를 하게 된다. 4·3학살의 주범(미군정이 지휘하는 군경, 이승만 세력의 우익테러단체)들은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워 권력을 행사해야 했으므로 선거반대투쟁에 돌입한 제주도민들을 압살하기에 이른다. 그 희생자 수는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만 3~4천 명, 4·3사건 연구자들에 의하면 3~5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7년 3월 1일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대가 3·1절 발포사건을 일으키자 제주도민은 이에 항의해 3월10일부터 민·관이 함께 총파업에 들어가고 군·경은 대대적인 체포를 감행한다. 제주 유치장에 대한 1948년 3월 11일자 미군 감찰 보고서를 보면, “10x12피트(약3.3평)의 한 감방에 35명이 수감되고 비교적 작은 유치장 안에 전체 365명의 죄수가 수감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47년 3·1발포사건 이후 1948년 4·3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검속자 수는 2500 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난다(제주4·3평화기념관 전시실 자료). 4월 3일 제주에서 무장대의 습격이 발생하자, 당시 좌익뿐 아니라 우익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까지 가세한 선거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상황인지라 제주의 무장대가 미칠 영향을 우려한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군·경·우익테러단체를 통해 제주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과 학살을 자행하게 된다.
절해고도라고? 절해고도의 무지렁이들이라고?
모독하지 말 것
농락하지 말 것
능멸하지 말 것
능멸하다 저주받지 말 것
기어코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만들어지고 있다
1948년 5·10선거
놀라워라
제주도민
해가 떠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선거가
해방된 나라를
둘로 쪼갠다고
그 선거를 거부해야 한다고 깨닫고 있었다
그믐의 그믐달 진 어둠속
다른 내일이 있다고 깨닫고 있었다
누가 지령을 보내고
누가 지령을 받은 것 아니었다
저절로 선거 거부가 퍼져갔다
천년 간난의 땅
바닷가 한바퀴 돌아 퍼져갔다
누군가가 나서서 알렸다
아침 일곱시 나팔소리가 났다
삼양에서 / 함덕에서
정의에서 / 한림에서
제주도의 모든 마을에서 사람들 집을 비웠다
제주읍 성내 제외한
외도리 / 이호리 / 도두리 / 노형리
오라리 / 아라리 / 화북리 사람들
< … >
대정 사람들 집 비우고 산으로 갔다
< … >
(‘한라산’, 20권)
“심지어 선거관리위원도 산으로” 가 “선거를 거부”하니 “투표소 텅 비었다”(앞의 시). 이런 현상이 육지에 전파되게 내버려 둘 학살의 주범이 아니었던 것이다.
북촌마을의 너븐숭이 애기무덤
고은 시인이 청년 시절 행한 자살 시도들 중 하나는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다가 섬에 다다르기 전 제주해협에 투신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 시인은 술에 취해 잠이 들고 자살에 실패하는 덕분에 제주도에서 3년간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훗날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그곳의 3년 동안에 걸쳐서 내 정신의 어떤 바탕을 만들었으며 나의 창조적인 충동이나 현실에 대한 인식의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런 개안開眼의 은혜는 제주도가 나에게 준 술만큼 잊어버릴 수 없는 선물이다.”(고은 전집 38권, 13-14쪽, <제주도>, 1975) 시인이 제주도에 사는 동안 알게 된 4·3의 뼈아픈 역사가 <만인보>에 여러 편의 시로 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마을의 남자들이 동시에 몰살당해 ‘무남촌’이라 불리던 마을인 조천읍 북촌리(본 연재 13회 참조), 4·3사건 당시 최대의 인명피해를 낸 1949년 1월 17일 북촌대학살 현장의 한 곳인 옴팡밭(‘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에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던 당시의 모습을 형상화해 관과 같은 긴 비석들이 포개어지거나 축 늘어져 있다.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 기념비 앞에 쓰러져 있는 이 비석들에는 옴팡밭에서 오누이와 마을사람들의 죽음을 겪어야 했던 순이삼촌이 정신적으로는 기실 “한 달 보름 전에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삼십 년 전 그날 그 밭에서 죽은” 것임을 알려주는 소설의 글귀들이 쓰여 있기도 하고 4·3백비처럼 훗날을 위해 비워져 있기도 하다. 너븐숭이라 불리는 이 장소에는 또한, 돌로 이루어진 애기무덤들이 있다. 학살 당시 어른들의 시신은 다른 곳에 안장되었으나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한 그대로 그렇게 수십 년을 버텨온 것이다.
또 다른 마을의 모습은 이러하다.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 담배꽁초를 던졌다 / 침 뱉었다 / 오라리 마을 /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 손자는 불응했다 /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 < … > // 영감 손자 때려봐 //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 쎄게 쳐 // 세게 쳤다 //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 울면서 / 서로 따귀를 쳤다 // 빨갱이 할아버지가 / 빨갱이 손자를 치고 / 빨갱이 손자가 /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 이게 바로 빨갱이의 놀이다 봐라 // 그뒤 총소리가 났다 // 할아버지 임차순과 / 손자 임경표 / 더 이상 /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 총소리 뒤 / 제주도 까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오라리’, 19권).
1992년 다랑쉬굴의 4.3희생자 유해들이 제주4·3연구소와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에 의해 44년 만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1948년 12월 18일 당시 9연대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들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랑쉬굴은 정비되어 있지 않다. 44년 만에 발견된 희생자들의 유골을 급히 화장해 유족들의 가슴에 또다시 피멍을 들게 한 자들은 무엇을 감추고자 함인가.
지난 2일 1947년 3.1 발포사건이 있었던 제주시 관덕정 앞에서 4.3문화예술축전의 일환으로 거리굿 '관덕정 꽃놀레'가 행해지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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