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인디씬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를 가득 메우는 대중 음악의 포화에 그들의 음악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따스한 느낌의 노란 전구들이 거실을 아늑하게 비추고 있었다. 둥근 원형 테이블에서는 향긋한 커피 내음이 은은하게 퍼졌고, 클래식컬한 톱니 시계는 2시를 향해 힘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고개를 지그시 올려다 보니 진한 남색 계열의 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치 19년이란 ‘음악 세월’을 축약한 듯한 비주얼 아트와 사진이 미술관 같은 자태로 걸려 있었다. 19일 칼 바람에 황량하게 나뒹구는 낙엽들을 등지고 들어선 밴드 넬(NELL·김종완<보컬>, 이정훈<베이스>, 이재경<기타>, 정재원<드럼>)의 사무실 겸 녹음실. 그 곳 만의 따스하고 아늑한 서정에 훈훈해질 무렵 넬의 멤버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종완)저 안 쪽에서 작업을 하고 여기선 에너지를 충전해요. 사실상 집보다 오래 저희가 머무는 곳이죠. 처음엔 그레이 계열의 무채색 공간이었는데, 오히려 점점 에너지가 소진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리프레시 되지도 않고. 그래서 5~6개월 전쯤 인테리어 작업 하자, 했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 있고 싶어 하잖아요?”
2016년 밴드는 ‘스페이스 보헤미안’이란 회사를 설립하고 이 곳에 둥지를 틀었다. 대부분의 뮤지션처럼 자신 만의 레이블을 갖고 싶다는 ‘꿈’ 때문이었다.
“(종완)오래 품고 있던 로망이었기에…지금이 아니면 늦을 것 같았어요. 모든 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을 우리가 져야 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음악 측면에서 보자면 환경이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아요. 다행히 멤버가 네 명이라 (음악 외적의) 일은 나눠서 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재경)예전엔 음악만 신경을 썼다면 이제는 다른 것도 많이 배우게 되고, 음악 하는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된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정훈)아마 회사를 설립하고 저희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변화가 우리 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점일 거에요. 멤버들 모두 이 곳 근처가 집이라 작업하기도 편하고요. 예전에는 녹음실도 워낙 먼 데다 갈 때마다 예약을 해야 해서 번거로움이 있었죠.”
지난 14일 '행복했으면 좋겠어'를 발매한 밴드 넬(NELL). 이틀 뒤 '스페이스 보헤미안'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타이틀곡 '헤어지기로 해' 버스킹 버전 영상을 공개했다. 사진/'스페이스 보헤미안' 유튜브 캡처
직접 수치를 재고 공사한 이 공간에서 밴드의 시간은 무한대에 가깝게 늘어난다. 어느 만화 속 ‘시간과 정신의 방’을 연상시킨다고 하자 그 반대에 가깝다며 웃는다. “(종완)작업실에서 하루 정도 작업을 했다 생각해도 나와 보면 한 달이, 일 년이 지나 있어요. 정말 ‘안 좋은 방’이죠. 세상과 동떨어진. 술 먹을 때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음. 그래도 자기 만의 공간을 갖고 있다는 건 좋은 것 같아요. 일상 생활 안에서 우리끼리 즐길 수 있는 것도 필요하고 음악을 하고 싶을 때 편하게 즐기면서 할 수도 있고. 음악 하는 사람들이니까 결국 공간이 음악과 결부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재원)최근엔 여기서 버스킹 영상도 만들어 저희 유튜브 채널에 올렸어요. 앨범 녹음도 하고, 공연 영상에 쓸 소스도 작업하고, 다용도로 쓰고 있는 것 같아요.”
회사 설립 후 밴드는 아티스트로서의 ‘자율성’도 확립해가고 있다. 앨범 작업 외에 싱글 형태의 음원도 내고 여러 아티스트들과 콜라보레이션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그루비룸, 김성규, 빈첸, 워너원 등에 이어 최근엔 방탄소년단(BTS) RM의 믹스테잎에도 참여했다.
“(종완)사실 콜라보는 누구랑 하든 비슷한 것 같아요. 마음이 결정될 때 그때부터 음악적으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방식이 항상 즐겁고 재밌어요. 필드에서 자기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들한테 직접적으로 배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우리 내에서 서로 연주하며 하는 음악도 콜라보거든요. 다만 우리끼리의 콜라보가 익숙한 바운더리 내에 갇혀 있는 것이라면, 외부 작업은 밖의 색채가 들어오는 것이라 배우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요리 같은 경우도 직접 같이 하는 게 책을 보면서 배우는 것보다 효과적인 것처럼.”
밴드 넬(NELL)의 새 앨범 '행복했으면 좋겠어'. 사진/스페이스보헤미안
지난 14일 밴드는 새 앨범 ‘행복했으면 좋겠어’를 발매했다. 지난 2016년 발매된 정규 7집 ‘C’ 이후 약 2년2개월 만이다. 올해 4월 기존 곡들을 재편곡해 진행한 콘서트 ‘HOME’의 일부 곡들을 추려 녹음했다. ‘행복’이란 단어가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던 이들이 왜 ‘행복’이란 글자를 앨범 전면에 내세웠을까, 궁금했다.
“(종완)‘행복해’가 아니잖아요.” 멤버들 모두 웃음을 터뜨린다.
“행복을 조성하는 분위기를 보통 싫어해요. 그게 힘들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올해 사적으로도 사건, 사고가 많았고 그래서 그런 바람을 담아서 지었어요. 우리도 우리지만 팬들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이 나한테 그런 생각을 전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평상시 맨날 했던 얘기가 행복해진다는 거는 힘들다였어요. 순간, 순간의 행복은 있겠지만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힘들단 사실을) 받아 들이면 편해진다는 걸 술 먹을 때 마다 생각해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저는 낙천적인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어요. 행복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요. 밝다가 무너지는 사람들도 많이 봤는데, 그래서 굳이 행복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큰 일이 생겨도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듯 넘어갈 때도 많아요. X됐다 해봤자 달라질 게 없을 거라는 걸 아니까.”
베이스 이정훈(왼쪽부터), 보컬 김종완, 드럼 정재원, 기타 이재경. 사진/스페이스보헤미안
그렇다면 멤버들이 생각하는 ‘행복론’은 뭘까. ‘삶의 궁극적 목표’라 거창하게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 계열? 아니면 단순히 굴 튀김을 먹을 때라 말하는 하루키 계열? 흥미롭다는 듯 멤버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유추해 갔다.
“(재경)제 개인적으로는 어떤 음악인이나 자기가 원하는 음악이 제대로 나왔을 때 인 것 같아요.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팬들이 있다는 거. 반응이 와야되는 것 같아요.”
“(종완)그런 것 같아요. 말 보단 그런 순간이 있을 때, 신체적 반응인 것 같아요. 철학적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진짜로 뭔가 행복할 때는 몸이 반응하는데 그런 짜릿짜릿한 순간. 하루키도 먹을 때의 그 미각 반응을 굴 튀김에 비유한 게 아닐는지. 저희도 공연 때라든지, 음반 믹스 도중에 반응이 먼저 오거든요. 닭살이 돋을 때도 있고 몸이 나른해지기도 하고.”
“(정훈)믹스가 끝나고 연초를 피울 때 느끼는 순간, 그런 게 행복이 아닐까. 아, 한 번은 시상식 때 종완이가 수상소감을 한 적이 있어요. ‘저희보다 저희 음악을 아껴주시는 팬들에게 감사드립니다’라 했었죠. 팬들 덕에 저희는 재밌게 음악을 할 수 있는 거구나를 느꼈던 것 같아요.”
“(재경)나이 먹으면서도 느끼는 것 같은데, 불행하지 않은 게 행복한 거 같아요.”
“(종완)그래서 행복에 큰 중점을 둘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다 그렇지 못하니까 거기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비관 이런 거에 집착하지 않잖아요.”
“(재원)머리만 아파요. 행복에 대해서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종완)그런 애들이 점점 행복 찾겠다고 산으로 간다니까?”
“(정훈)그리고 말하는 거지. 아 나 진짜 행복할 수도 있었…”
멤버들 모두 크게 함박 웃음을 터뜨렸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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