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19년 4월 11일 제1차세계대전이 마무리된 직후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탄생한 국제노동기구(ILO, 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는 올해로 설립 100돌을 맞이했다. ILO는 오는 6월 10~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설립 100주년 총회를 연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총회와 함께 열리는 ‘국제노동 컨퍼런스’에 특별 연설자로 초청받았다. 하지만 청와대는 선뜻 총회 참석을 결정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국내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 논의가 진전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핵심협약을 모두 비준해야 회의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면이 서지 않는 셈이다.
ILO는 노동3권을 보호하는 UN 전문기구다. ILO는 전체 협약 189개 중 최소한의 노동권 보호 의무 사항을 담은 8개를 회원국에게 비준을 권고하는데 이를 ILO 핵심협약이라 한다. 핵심협약의 8개 항은 결사의 자유(제87호, 제98호), 강제노동 철폐(제29호, 제105호), 차별 금지(제100호, 제111호), 아동노동 금지(제138호, 제182호) 협약으로 이뤄졌다.
대한민국은 지난 1991년 UN에 가입하면서 동시에 ILO에 가입했다. 가입한지 28년이 지났지만 한국은 총 189개 조항 중 29개만을 비준했고, 핵심협약 8개 중 아동 노동 금지와 차별 금지 조항 4개만 비준했다. OECD국가의 평균 비준 개수인 61개와 비교해 턱없이 모자라는 숫자다. 187개 회원국의 비준 평균 개수인 47개와 비교해도 나은 점이 없다.
박수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사노위에서 ILO(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논의에 대한 전체회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ILO 핵심협약 비준, 이행되지 않은 약속
우리나라는 지난 1996년 OECD가입, 98년 ILO 고위급 노사정의 한국 방문, 2006년과 2008년 유엔 이사국 출마, 2017년 ILO 총재 가이 라이더의 한국 방문 등에서 모두 ILO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했다. 한국정부의 약속과 무관하게 ILO는 비준하지 않은 나머지 핵심협약을 비준하라고 한국 정부에게 권고와 비판을 꾸준히 반복했다.
ILO의 맹점은 UN 전문기구이긴 하나 UN과 달리 실질적으로 취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ILO가 어떤 국가에게 권고를 하거나 누군가 ILO를 제소하였다는 것 자체가 압박으로, 이슈화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 정도 까지다. 미얀마가 군부독재 하에 놓여있던 2000년, 미얀마 정부의 강제노동 행위가 ILO의 주요 안건으로 자주 올라왔다. ILO는 미얀마에 수 차례 권고하였지만 소용이 없자 미얀마와 교류를 줄이라고 다국적기업들에게 권고한 것이 ILO가 행한 가장 강력한 압박이다.
우리 정부는 2010년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후 단 하나의 협약도 추가 비준하지 못했다. 지난 3월 한·EU FTA 무역위원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세실리아 말름스트룀 EU 통상집행위원은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ILO와 EU는 한국이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는 점과 한국의 노동법이 ILO 원칙에 합치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 대해 우려를 가지고 있다”며 “모든 기업이 ILO 협약 같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업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비준을 하지 않음으로써 노동 후진국이라는 이미지가 씌워질 뿐만 아니라 무역과 관련해 실질적인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경고다.
대한민국은 왜 아직도 국제적인 노동 기준의 기본인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못했을까. 조약의 체결은 대통령의 비준권 행사를 통해 효력을 발한다. 그러나 협약의 조항이 국내 법률과 충돌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국내 법률을 개정해야 비준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안 자체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비준이 아니어도 결과적으로 국회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ILO 핵심협약의 비준은 문재인 정부 이전 정부에서도 모두 공약으로 내건 적이 있으나 모두 국회와 경영계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로 ILO 핵심협약 비준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촛불혁명 이후 국내 정치 개혁에 대한 큰 기대를 받았으나 핵심협약 비준에 대해서는 큰 힘을 쓰고 있지 못하다. 노동법과 관련된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와 환노위 산하 고용노동소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모두 자유한국당이 위원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비준의 또 다른 난관은 경제사회노동위다. 2018년 11월 22일 출범한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는 ‘노’와 ‘사’와 ‘정’이 협상하는 기구인 노사정위를 더 많은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기구로 바꾸자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단체다. 경사노위에서 ILO 핵심협약의 비준을 사회적 대화를 통해 사회적 합의에 도출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나 되려 이것이 ILO 핵심협약의 발목을 잡고 있을 수 있다.
지난 15일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해 경사노위의 공익위원회가 권고안을 내놓았지만 합의에 실패하였다. ‘노’와 ‘사’ 모두 불만을 가지며 각 측 마다 별개 입장문을 발표했다. 노동계는 “핵심협약 비준은 정부에서 해야 할 의무이지 거래나 교섭의 대상이 아니다”는 입장이였다. 경영계는 파업 시 대체근로 전면 허용과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기업의 형사처벌 폐지, 파업 시 노조의 회사 점거 행위를 금지 등을 요구사항으로 내놓았는데 대체근로 허용과 형사처벌 폐지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권고안과 경사노위 구성 모두 ‘노’에 치우쳐졌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경사노위의 사회적 대화를 통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노동계를 중심으로 정부가 노동관계법 개정을 미루고 ILO 핵심협약 비준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한다는 이른바 ‘선(先) 비준 후(後) 입법’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국제노동기준을 따르는 문제로 정부가 주도권을 잡고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마당에 경사노위에게 책임을 넘겨 논의만 길어졌다는 지적이다.
2018년 6월 국제노총은 ‘2018년 국제노총 세계노동권리지수(2018 ITUC Global Rights Index)’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노동법이 존재하는 수준에서 최악의 등급인 5등급을 받았다. 한국은 2014년 이후 계속 최하위 등급을 받고 있다. 5등급은 노동권이 있다 해도 지켜진다는 보장이 없는(No guarantee of right) 국가라는 의미다.
2018년 환경, 인적자원, 시장, 혁신과 생태계의 4대 분야로 평가한 WEF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대상 140개 국가 중 종합 평가는 15위를 기록했으나 시장 분야 노동 부문의 지표 중 노사협력(124위), 노동자 권리(108위)는 하위권으로 평가됐다. 다양한 조사통계에서 한국은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가 끊임없이 국제 노동 기준에 부합하지도 않은 요구사항을 고집하는 이유는 일단 반대하고 보면 절대 손해 볼 일은 없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특수고용노동자 총궐기 대회 및 '국제노동기구(ILO) 100주년 핵심협약 비준과 노동조합법 2조 개정' 등을 촉구하는 집회를 마친후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ILO 핵심협약이 비준되면?
ILO 핵심협약 비준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구제받을 수 있을까. 2018년 3월 24일에 발간된 고용노동부와 한국노동연구원의 ‘특수형태 근로종사자의 규모 추정’공동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특수고용직노동자는 약 220만명으로 전체 취업자에 8.2%에 달한다. 노동조합 및 노동조합 관계법 2조에 의해 특수고용직노동자는 노동자의 성격을 띠는 업무를 하면서도 사업자와 도급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분류된다. 그렇기에 노조 형성이 불가능하고 다양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한국에서의 ILO 핵심협약 87호와 98호의 의미는 고용 관계와 상관없이 노동3권을 보장해준다는 것에 있다. 핵심협약 비준은 ‘야쿠르트 아줌마’(프레시 매니저), 학습지 교사, 보험 설계사를 노동자로 인정하여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불이 나면 불은 누가 끄냐”는 등의 공무원들의 ‘정치 파업’의 일상화를 걱정한다. 하지만 이는 ILO 핵심협약을 오해한 것에서 비롯한다. ILO는 생명·신체의 안전에 직접 결부된 업무의 경우 국가가 쟁의 행위를 제한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현행 노조법도 ‘필수유지업무 제도’를 둬서 철도·수도·전기사업 등에선 파업 중에도 일정 인원이 일하도록 규정하고 사용자의 대체인력 사용도 허용한 규정이 있다. 게다가 공익위원 안은 소방공무원 등에 대해 노조 만들 권리인 단결권을 인정하는 것이지, 파업권까지 인정하지는 않았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박근혜 정부에서 7만명 노조원 중 9명이 해직자라는 이유로 법외노조로 분류했던 전교조가 다시 법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ILO는 전교조 건을 가지고 한국 정부에게 수 차례 권고조치를 한 바 있다. 전교조도 소방관과 동일하다. 지난 16일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더라도 공무원이나 교원의 경우 특별법에 의해 단체행동권이 제한되므로 파업을 불가능하다”며 정치파업의 일상화에 대한 논란을 일축했다.
강충호 한국사회책임협동조합 이사장은 정부의 소극적인 행동과 경영계의 무리한 요구 행태를 비판하며 “경영계의 노동에 대한 시각이 아직도 부정적이고 후진적”이라며 “ILO 핵심협약 비준은 노사관계를 종속 관계가 아닌 동등한 동반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8일 국회 환노위 김학용 위원장은 “ILO 핵심협약 비준은 최저임금을 뛰어넘는 핵폭탄급 이슈”라고 언급하며 대통령이 6월 ILO 총회 참가 전까지 시간에 쫓기며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다. 강 이사장은 “문 대통령의 이번 총회 참여는 여태까지 미뤘던, 노동 후진국이란 허물을 한번에 벗을 수 있는 두 번 다시 없는 기회일 수 있다”며 “6월의 ILO 100주년 총회에서 노동 기본권을 존중하는 나라의 하나로서 선진국 사이에 당당히 설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현석 바람저널리스트
편집 KSRN집행위원회(www.ksr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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