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전 자유롭지 못한 뮤지션이에요..."
20여년 전 ‘음악하겠다’며 파리로 훌쩍 떠난 전례가 있는, 이 자유의 뮤지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의외였다. 어떠한 구속 없이 낭만적으로 음악을 해왔을 것 같던 편견이 단 몇 마디 만에 산산조각 나고야 말았다. “제가 음악 완성도에 대한 집착이 특히 세서요. 자유롭다기보다는 예, 발버둥을 치는 거죠.”
이 생각보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뮤지션 정재형(50)이 9년 만에 새 솔로 앨범 ‘아베크 피아노(Avec Piano)’로 돌아왔다. 2010년 낸 전작 ‘르 쁘띠 피아노(Le Petit Piano)’를 잇는 피아노 연주의 연작 앨범이다.
전작이 한없이 서정적이고 세련된 피아노 정서를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첼로와 바이올린, 비올라를 더해 ‘실내악’적으로 구성한 점이 특징이다. 확장된 스케일에 과감하고 실험적인 면모로의 전환을 꾀했다. 지난 5일 서울 강남구에서 만난 그는 칠흑 같은 고행길에서 이제 막 빠져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제가 곡을 만들 때 중요한 건 물리적인 시간이거든요. 고통스럽지만 혼자 온전히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오전, 오후 2~3시간씩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약간 바보 같을 거예요. 음악적 책임감이 큰 탓에 쉽게, 쉽게 하진 못하는 것 같아요. 생각만큼 자유롭진 못한 편이에요."
습작은 한, 두달 만에 만들어졌지만 앨범으로 완성하기까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는 고민이 길어졌고, 영화와 뮤지컬 음악 작업, 방송 출연을 병행하다 보니 물리적인 작업량도 부족했다. 지난해에는 "안되겠다" 싶어 과감하게 모든 걸 중단하고 3주 정도 일본 가마쿠라로 '작업 여행'을 떠났다.
"숙소가 가로등 몇 안되는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정말 여태까진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어요. 처음엔 손전등 들고 올라가면서 여기에서 작업을 할 수 있을까 했는데요. 이틀 지나니까 그 곳의 물 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서서히 동화됐어요."
'자연'에서 받은 위안의 감정들로 꽉 막혀있던 이야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오롯이 자연 앞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이야기는 외롭고 쓸쓸했지만 꼭 슬프지만은 않았다. "충만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마음이 꽉 차 있는 시간이요. 자연 속에서 온전히 나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면, 아마 우리 모두 이런 느낌을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재형 아베크 피아노 트랙리스트. 사진/안테나뮤직
타이틀곡 '라 메르'는 숙소 앞 바다를 보고 그려낸 곡이다. 잔잔하다가도 맹렬한 파도의 조각들을 훑어가며 가슴 아픈 일들을 치유하는 듯한 바이올린 선율이 인상적이다. 바람의 음색을 첼로소리로 담아낸 '미스트랄'과 산의 정경을 담은 '르 몽' 등 앨범에 수록된 8곡은 모두 자연의 숭고함, 그로부터 얻은 위안을 그리고 있다.
“종종 서핑을 즐겨 하곤 하는데요. 자연 앞에 서면 정말 초라해진다는 걸 느껴요. 인간의 나약함, 무기력함에 대한 생각이 들고, 요즘 저를 일깨우는 것들은 아마 그런 자연이었던 것 같아요.”
1990년대 그룹 베이시스로 데뷔할 때부터 그에게 따라 붙던 단어는 ‘파격’이었다. 댄스와 발라드가 기승을 부리던 당시 그는 두 명의 멤버와 함께 현악기들을 무대에 올리는 실험을 강행했다. 이후 파리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영화음악부터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들을 흡수했다. 2011년 정형돈과 함께 무한도전에서 선보인 ‘순정마초’는 대중성과 예술성의 밸런싱을 적절히 조화시켜 성공시킨 대표곡이다.
“‘순정마초’는 힘이 센 멜로디였고, 쉽진 않을 거라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방송에 나가게 됐고,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그 이후로 자신감을 많이 얻었어요. 이번 앨범 역시 가사가 없어서 조금 생소하실 수도 있지만 분명 소통하고 느낄 수 있는 앨범일 거라 생각해요.”
왜 다시 피아노였나 물었다. 애증이자 애정이라 답했다. “작곡하는 사람으로 피아노를 했는데, 어느순간 피아니스트처럼 열심히 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피아노를 내가 좋아하긴 하는구나, 싶었어요. 이제는 피아노를 제외하고는 제 시간을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아요.”
“큰 산을 넘었다”는 그는 다음 앨범에선 피아노를 위한 오케스트라를 만들 구상 중이다. 섬세하고 완벽을 요하는 성격 때문에 역시나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은 없다. “1부작이 아주 작은 아이였다면 이번 앨범은 그 아이가 조금 성장한 느낌으로 봐주시면 될 거예요. 3부작은 아직 고민 중이지만 전자음악 오케스트라부터 큰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조금 더 힘 덜 들이고 편하게 해볼 생각은 없냐” 물었다. “완벽한 곡을 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작곡가의 사명이자 의무”라며 그가 웃었다. “의도한 바를 정확하게 구현하는 게 아티스트의 사명아닐까 한다”며 “뮤지션으로 나이가 든다는 건 감각의 문제 보다는 책임감이 커지는 것”이라 설명을 대신했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자유롭지 못한 그가 있었다. 스스로를 갈고 닦아 만든 노래를 내고서야 그는 자유를 느낀다.
"생각해보면 저는 늘 발버둥을 쳤던 것 같아요. 삼십대 초 파리로 유학을 갔을 때도 그랬거든요. 학비를 벌기 위해 영화음악하고, 공부하고 했던 시간들이 참으로 처절했고요.”
“이번 앨범을 작업하면서도 속상하거나 성에 차지 않아 괴로운 시간들을 보냈어요. 근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앨범을 낼 수 있는 아티스트가 몇이나 될까' 생각하면서 제 자신을 위로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자유를 위해 계속 발버둥 치는 거죠, 뭐."
정재형. 사진/안테나뮤직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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