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백아란·최홍 기자] 금융당국이 시중은행을 앞세워 암호화폐(가상자산·가상통화) 거래소 신고·등록 등 인증시스템 구축에 나설 전망이다. 암호화폐 거래소 등록제를 골자로 하는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이하 특금법)' 개정안이 국회에 표류 중인만큼 은행권과 공조해 제도 공백을 보완할 장치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다만 은행 내부에서는 정부가 암호화폐에 대한 법·제도적 장치를 만들지 않은 상황에서 리스크를 떠안아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럽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비트코인 가격이 1400만원을 돌파한 지난달 26일 서울시내 암호화폐 거래소 앞을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뉴시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지난 3일 국민·신한·농협·
기업은행(024110) 등 시중은행 자금세탁방지 및 암호화폐 관련 부서 실무진과 만나 최근 발표된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 가이드라인을 공유하고 대응방안 등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날 회의에서는 암호화폐 거래소에 계좌를 발급해주는 은행의 실명확인 계좌서비스 재계약 진행 상황을 살펴보고, 자금세탁방지(AML)·본인인증(KYC)을 강화하는 방안 등이 다뤄졌다.
당국 한 관계자는 "암호화폐 취급과 관련해 자금세탁이나 테러자금조달 방지 등에 대한 현안을 논의하고 관리 방안을 함께 모색해보자는 취지로 자리를 마련했다"며 "아직 더 얘기를 해봐야겠지만, 일반 법인계좌(일명 벌집계좌)를 통한 집금행위에 대한 대응 필요성이 커진 만큼 금융당국과 시중은행 등이 거래소 AML·KYC 실태를 점검하는 것을 고려해볼만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과 시중은행, 금융보안원 등이 테스크포스팀(TFT)을 만들어 거래소에 대한 현장 실사를 진행하고 AML·KYC 정비 등을 확인해 인증서를 발급하는 형태로 암호화폐 거래소 신고·등록을 위한 인증시스템을 구축한다는 생각이다.
이 관계자는 다만 "인증시스템 구축 등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선 은행의 협조와 FIU와의 조율이 필요하다"면서 "우선 (FATF 권고안대로 갈 경우) 은행권에 어떤 애로 사항이 있는지 전반적인 의견을 청취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논의해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지난달 발표된 FATF 권고안에 따른 대응으로 분석된다.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따르면 FATF는 지난달 21일 미국 올랜도에서 열린 총회에서 ‘가상자산 국제 기준 및 공개성명서’를 채택했다. 여기에는 암호화폐 거래소에게 암호화폐 송수신자의 신원을 모두 확인하는 등 금융회사에 준하는 자금세탁방지의무를 부과하고, 암호화폐 취급에 앞서 감독당국에게 암호화폐 취급 인·허가(license)를 받거나 신고·등록(register)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당국은 테러자금 조달금지(CFT)를 비롯한 거래소의 자금세탁방지 관련 규제를 관리·감독하며, 암호화폐 거래소가 해당 의무를 위반할 경우 허가·신고를 취소·제한·중지할 수 있는 권한과 효과적·비례적·억제적 제재(effective, proportionate and dissuasive sanctions) 부과권한 등을 보유하도록 하는 방안도 ‘가상자산 관련 주석서(Interpretive Note to R.15)’ 최종 확정안에 포함됐다.
그동안 정부 차원에서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한 이렇다 할 가이드라인 없이 사실상 방관하는 입장을 취해왔다면 앞으로는 범죄자의 암호화폐업(業) 진입을 차단하고 미신고 영업을 제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지침을 내린 셈이다.
현재 FATF는 내년 6월 총회에서 각국 감독당국의 이행 상황을 점검할 예정이며, 금융당국은 향후 1년 안에 FATF 주석대로 규제를 시행해야 한다. 문제는 FATF의 권고기준 및 주석서의 주요내용을 반영한 법안(특금법)이 1년 4개월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금융위는 올해 주요 입법과제 중 하나로 특금법을 꼽으며, 지난 9일 만료예정이었던 행정지도(가상통화 자금세탁 방지 가이드라인)를 법제화 후 폐지하기로 했다. 특금법 개정에 발맞춰 하위법령에 FATF의 가상자산 지침서 내용을 활용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6월 임시 국회 마지막 날(19일)이 다음주로 다가온 가운데 아직까지 특금법 개정에 대한 진척은 없는 실정이다. 결국 법·제도 공백을 은행과 감독당국이 공동 인증하는 등의 형태로 메꿔야 하는 방안이 대두된 셈이다.
한편, 시중은행에서는 몸을 사리는 형국이다.
자금 세탁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책임도 은행이 뒤집어 써야하는 탓에 '눈치보기'에 급급하며 소극적인 행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은 올해 FATF 평가단의 첫 현장 점검이 진행 중인 상황인데다 특히 농협은행과 기업은행의 경우 뉴욕금융청(DFS)으로부터 자금세탁방지 규정 준수 미흡 등의 이유로 지적을 받은 바 있어 관련 리스크를 떠안기가 부담스럽다는 입장이다.
실제 작년 초 국민·신한·KEB하나·농협·기업·광주은행 등 6개 은행이 금융당국의 지침에 따라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서비스'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현재 암호화폐 거래소와 정식 계약을 맺고 실명계좌를 발급하는 곳은 신한(코빗)·농협(빗썸·코인원)·기업은행(업비트) 등 3곳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대다수 암호화폐 거래소들은 법인계좌로 투자금을 받는 벌집계좌 방식으로 운영 되고 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암호화폐 거래소로부터 계좌발급 요청이 들어오긴 하지만, 현재로선 신규 거래소에 대한 계좌 발급을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공동 인증시스템 구축도) 당국에서 요구한다면 따를 수밖에 없지만, 아무래도 부담이 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금융권 다른 관계자 또한 "자금세탁방지와 관련해 모니터링을 진행하고 있지만,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시세가 회복되고 있는 상황에서 거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경우 그 부담이 너무 커진다"라며 "본격적으로 은행이 나서기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백아란·최홍 기자 alive0203@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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