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밴드 9와 숫자들 4집 '서울시 여러분'. 사진/오름엔터테인먼트
최근 밴드 ‘9와 숫자들’[송재경(보컬), 유병덕(드럼), 유정목(기타), 꿀버섯(베이스)]은 4집 ‘서울시 여러분’을 냈다. 2016년 ‘수렴과 발산’ 이후 3년 만의 정규 앨범이다.
제목에 쓰인 ‘서울시’는 서울에서 착상한 공간, 즉 가상의 도시다. 인구 1000만의 부유하고 화려한 이 도시는 각종 이면 현상들을 품고 있다. 소외와 차별, 고독, 박탈감, 공동체 분화…. 지난달 19일 서울 망리단길에서 만난 이들은 “소외되거나 스쳐갈 수 있는 타인의 삶을 함께 고민해보고 싶었다”며 “공감과 연대 측면에서 바라보고 곡을 썼다”고 설명했다.
첫 곡 ‘서울시’는 신작의 전체 서사를 이끄는 큰 줄기다. 송재경의 아련한 목소리가 기타의 쇠줄 진동에 겹쳐져 이 세계를 둘러싼 고민을 안개처럼 퍼뜨린다. 서럽게 울던 우리 시간들은 ‘번듯한 이 도시가 보듬지 못한 외로움’이 되고 만다.
“많은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킨 채 살아가요. 타인에게 묻고 관찰하고 마음을 열 때, 우리는 비로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요.”(재경)
망리단길 한 카페에서 만난 밴드 ‘9와 숫자들’. 왼쪽부터 꿀버섯(베이스), 유병덕(드럼), 유정목(기타), 송재경(보컬), 사진/오름엔터테인먼트
‘서울시’를 지나면 이 시대 서글픈 자화상들이 경쾌한 복고풍 사운드에 아른거린다. 주로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A씨’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세대, 성별을 아우른다.
A씨는 다 큰 자식들 뒷바라지에 어린 손녀까지 돌보는 우리의 어머니들(‘주부가요’)이며, 맹목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어린 시절 꿈을 돌아보는 이 시대 청춘들(‘물고기자리’)이다. 투기의 폐해와 부의 편중,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지중해’)이고, 약하거나 가난하거나 달라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I.DUB.U, 여러분’)이기도 하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층, 은퇴세대, 소수자들…. 한국 사회의 모순과 아픔의 편린들이 현대 소설처럼 부유한다.
“신보를 준비하면서 젊은 작가들의 단편 소설집을 많이 읽었어요. 김애란, 최은영…. 시시콜콜한 이야기 끝에 끈덕진 여운과 생각거리를 주는 소설들이요.”(재경)
망원 인근에서 만난 밴드 9와 숫자들. 왼쪽부터 송재경(보컬), 유정목(기타), 유병덕(드럼), 꿀버섯(베이스). 최근 망리단길에도 젠트리피케이션 조짐이 일면서 이들은 "다른 대안지역을 탐색할 지도 모른다"고 했다. 사진/오름엔터테인먼트
실제로 이들은 단편소설적 설정을 구상해 곡의 모티프로 활용했다. 앞서 곡의 여러 화자들을 ‘A씨’라 칭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앨범 기획 단계부터 멤버들은 곡의 소재들을 실제 삶의 주변에서 채집했다. 다양한 세대, 성별로부터 직접 들은 고민, 의견은 ‘A씨’들 이야기가 됐다.
“그럴법한 막연한 공감이 아닌 구체성을 갖고 싶었어요. 소설적인 설정을 깔아두면 개연성, 타당성이 커지고 그게 종국에는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재경) “전문적인 저널리스트처럼 심층적 고증까진 아니어도 그만큼 고심해서 만든 음악이에요.”(병덕)
곡 ‘주부가요’를 두고는 멤버들끼리 찬반이 양립하기도 했다. 주부라는 단어 자체에 사실상 차별, 불평등이 내재될 수 있다는 게 논점이었다. 이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의식으로 볼 때 이 단어는 특정 계층을 정체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며 “하지만 곡은 특정 계층, 세대를 한정하고 호도할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사 노동의 불공평성을 얘기하고자 했다”고 했다.
왜 C나 D가 아닌 모두 A의 이야기들일까. “대문자 A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어요. 하나는 사회라는 시스템 안에서 살아간다는 익명성. 다른 하나는 자신 만의 스토리를 갖고 산다는 삶의 주체성.”(재경)
밴드는 궁극에 초단편소설도 낼 계획이다. 밑그림까지 그려둔 이야기에 최근 살을 붙여가고 있다. 신문기사처럼 흘러가는 A씨들의 삶은 장밋빛 희망만으로 넘실대지 않는다. “행복이나 희망은 추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불안이나 불편의 해소 끝에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죠. 희망을 억지로 보여주려는 건 사기 같다고 생각해요.”(재경)
그럼에도 이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를 응원한다.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등불이 돼주고, 허전하고 쓸쓸할 때 벗이 돼주며.(마지막 곡 ‘여러분’) 조건 없는 공감과 위로를 보낸다.
망원 인근에서 만난 밴드 9와 숫자들. 왼쪽부터 유정목(기타), 꿀버섯(베이스), 유병덕(드럼), 송재경(보컬). 최근 망리단길 역시 젠트리피케이션 조짐이 일면서 이들은 "다른 대안지역을 탐색할 지도 모른다"고 했다. 사진/오름엔터테인먼트
사운드적으로는 전작 ‘수렴과 발산’의 팝적 요소가 더 짙어졌다. 곡 개성에 맞춰 밴드 기본 악기 사운드를 강조하고 특화했다. 브라스, 전문 코러스로 꽉 채워 넣던 흐름에서도 탈피. “팝 음반처럼 들리도록 기본 악기로 심플하게 갔어요. 다음 앨범에서는 또 펑크로 새롭게 가지 않을까….”(재경)
밴드 유랑 공통 질문의 시간. 신보는 멤버들에게 어떤 여행지로 비유될 수 있을까.
“저는 홍콩.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도시가 되고 있잖아요. 지금 가장 연대가 필요한 곳인 거 같아요.”(재경)
“조용한 섬마을 같은 곳이라고 생각을 해요. 어디 한 쪽으로 치우쳐진 게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쯤은 자기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번잡하지 않고 조용한 곳. 국내의 인적 드문 그런 곳이 제일 비슷한 곳이 되지 않을까….”(정목)
“저희 음악을 듣고 현실의 문제들이 해소됐으면 해요. 캘리포니아에 갔을 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삶의 온갖 희노애락을 잊을 수 있는 따사로운 햇살과 여유. 지금의 추운 서울과 반대되는 이미지기도 하고.”
과묵하게 자리를 지키던 꿀버섯이 마지막 대답으로 답하자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전 중국! 투어 가서 돈 많이 벌고 싶어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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