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7화)마지막에 찾아온 우연
입력 : 2019-11-04 00:00:00 수정 : 2019-11-04 09:20:24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데르수 우잘라> 속 조선인
 
“여기예요.” 들판과 숲길을 한참 걸은 후, 관목에 둘러싸여 독립된 공간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서자 니키타가 말했다. 그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비석이 하나, 자잘한 돌들 위에 서 있다. “아...” 순간 작은 실망감이 스쳤다. ‘일본인 사망자 위령비’, 비석에 쓰인 한자 문구다. 내가 은근히 기대했던 조선인의 흔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석에는 연도도 건립자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안내해 준 소년 니키타와 소녀 엘랴는 언제부터 비석이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외관상 새 것으로 보이는데 10년 남짓일지 그 이상일지. 비문이 한자로 쓰인 걸 보니, 후대의 일본인들이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지역에서 사망한 일본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위령비가 기리는 일본군 사망자 중에는 일본군 군복을 입고 죽어간 조선인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보다 수십 년 전, 먹고 살기 위해 우수리 지방으로 건너온 조선인들이 있었다.
 
꼬르폽스키 마을 숲속 일본인 사망자 위령비. 사진/필자 제공
 
데르수와 아르세니예프는 탐사 도중 밀림 속에서 여섯 구의 해골을 만난다. 뼈를 살펴보던 데르수는 그들이 살해당하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것이 아니며 약 2년 전 산불이 이곳을 휩쓸 때 이미 죽어 있었을 것으로 추리한다. 그들이 입고 있던 옷도 다 타버렸기 때문이다. 인골 옆에서 나온 쇠주전자, 도끼, 녹슨 칼, 송곳, 부싯돌, 담뱃대, 은반지 등을 보고 데르수는 이들이 조선인일 것이라 추측하고, 아르세니예프는 그들이 금맥을 찾아 먼 산속까지 들어왔다가 해안으로 나가지 못하고 굶어죽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데르수와 일행은 그들의 뼈를 묻어 주고 길을 계속 간다(아르세니예프 지음, 김욱 옮김, <데르수 우잘라>, 서울: 갈라파고스, 2005, 153~155쪽).
 
아르세니예프의 책 <데르수 우잘라>에는 조선인들로 추정되는 인골 외에 진짜 조선인들도 등장한다. 탐사대는 나이나 강 단구의 기슭과 해안 부근에서 조선인 오두막을 발견하는데, 거기에는 게를 잡고 검은담비를 사냥하며 사는 9명의 조선인 남자들이 중국식 변발을 하고 일부는 중국식 복장과 우데게(소수민족) 복장을 하고 있다. 아르세니예프는 이 조선인들이 사용하는 물레방아와 맷돌을 소개하면서, ‘아시아 대륙의 동방민족들 중 조선인이 처음으로 수력 사용을 생각해냈고’(러시아어 원문) 중국인들에게는 그런 기계가 없다고 쓰고 있다.
 
시호테알린 산맥. 아르세니예프와 데르수가 탐사한 곳으로, 시베리아 호랑이,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는 아무르 호랑이의 고향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아르세니예프 일행은 조선인 오두막의 온돌방을 빌리지만, 중국인을 좋아하지 않듯 조선인도 좋아하지 않는 데르수는 바람 부는 밖에서 잠을 청한다. 왜 조선인을 싫어하냐는 아르세니예프의 질문에 데르수가 떠올리는 것은 변화된 타이가 숲의 현실이다. 평화롭던 숲에 언젠가부터 중국인들이 나타나고 뒤이어 러시아인들이 나타나 사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더니, 그 후 조선인들이 오고 나중에는 해안가에 일본인들마저 나타난 것이다. 데르수가 조선인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숲에 불을 질러 검은담비가 사라지고 다른 짐승들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화전(火田)을 일구어야 했던 조선인들에게는 그것이 생존을 위한 방식이었지만 사냥을 하며 살아온 데르수에게는 숲과 자연의 삶을 파괴하는 행위였던 것이다(앞의 책, 180~184쪽).
 
원주민들을 속여 빚을 지게 만들고 노예화하는 중국인들, 연해주 지방의 식민화를 위해 숲을 밀어 도로·철도를 놓고 자국민을 이주시키는 러시아, 조선 말기 가난과 폭정을 피해 우수리로 와 금광을 찾다가 아사하고 화전을 일구거나 사냥을 하며 원주민과 갈등 관계에 놓였던 조선인들, 해변에 등장하다가 이후 제국주의 군대로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된 일본에 이르기까지, 이들 외지인들이 숲의 평화를 깨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사 속 열강들과 소수민족들의 대조적인 삶을 생각할 때, 결국 탐욕이 더 큰 자들이 약자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해 온 것은 아닐는지.
 
알렉세이 부라코프 씨의 목공소 모습. 러시아 국기와 지도가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목공소에 이르다
 
“혼자 돌아가실 수 있으세요?” 위령비 안내를 마친 니키타는 나를 먼저 보내고 엘랴와 좀 더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이지요!” 길치인지라 속으로 걱정되었지만 이만큼 도와준 것도 충분히 감사한데 더 이상 어찌 폐를 끼치랴. 그러나 내가 길을 못 찾을 거라 염려한 엘랴 덕분에 결국 마을로 돌아오는 길도 이 고마운 소년소녀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인적도 드문 곳에서 숲을 빠져나와 마을로 돌아오긴 힘들었을 것이다.
 
하바롭스크행 버스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주민 덕분에 기차역까지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는 데는 예정보다 한 시간쯤 더 걸렸는데, 우연하게도, 마지막에 만난 꼬르폽스키 주민과 가장 긴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마을 입구로 나가는 길을 찾는 나에게 목공 작업장에서 일하던 알렉세이 부라코프 씨가 길을 가르쳐 주다가 내가 이 마을에 온 이유를 듣더니 반색을 한다.
 
 “데르수 우잘라요?! 아, 그의 기념비 제막식 때 내가 시를 낭송했어요!” 알렉세이 씨는 하바롭스크 태생으로 1993년, 그의 표현에 의하면, 소비에트 공화국이 붕괴하고 혼란스럽던 ‘또 다른 혁명’의 시기에 꼬르폽스키로 이사했다. 목공소 지붕에는 그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 응원하느라 샀던 러시아 국기가 걸려 있고 열려진 한쪽 문에는 커다란 지도가 붙어 있다. 작업장 안에는 라디오에서 옛 러시아 노래가 흘러나온다.
 
자신의 목공 작업장에서 노트 메모를 사용하는 알렉세이 부라코프 씨. 사진/필자 제공
 
소년 알렉세이의 시낭송 추모
 
데르수를 기념하는 돌이 마을에 세워진 것은 1994년이지만 기념비 제막식이 열린 것은 1997년으로, 알렉세이 씨가 14세 소년이던 시절이다. “나는 당시 학생이었는데, 문학선생님이 내게 시를 주고 제막식에서 낭송하라고 했어요.” ‘시낭송?’ 매우 러시아답다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인들의 시 낭송은 독특한 어조와 리듬이 있다. 1990년대 내가 기억하는 러시아인들은 시를 좋아하고―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암송하는 시 하나쯤은 있었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 않았나? 나이 들면서 학교 때 외운 시를 잊었을 뿐. ‘시의 시대’라 불리던 한국의 80년대, 시집 선물이 흔했던 시절도 있었다.
 
1997년 꼬르폽스키 마을의 데르수 기념비 제막식에서 시낭송을 한 소년 알료샤(알렉세이). 사진/필자 제공
 
그런데 러시아인들이 데르수를 이토록 기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르세니예프의 탐사를 도와서? 책과 영화로 알려져서? 1970년대에 아르세니예프 시(市)에는 그와 데르수를 기념하는 바위가 세워졌다. 그들이 처음 만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들 중 하나인 까발레로보 마을의 제르칼나야 강(‘거울 같은’의 뜻, 예전 이름은 ‘따두시’) 위에도 절벽 같은 거대한 ‘데르수 바위’가 서 있다. 가장 최근인 2019년 9월에는 크라스늬야르 마을에 데르수의 청동 기념상이 세워졌다. 데르수의 이름을 딴 마을과 딱정벌레도 있다. 게다가, 1981년 체코의 천문학자 즈덴카 바브로바에 의해 발견된 소행성(4142)이 ‘데르수 우잘라’로 명명된 것에서 보이듯이, 데르수에 대한 열광은 러시아인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데르수’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자연과의 합일된 삶, 인간의 어떤 순수한 본연이나 원초를 향한 잠재된 열망의 반영일까? 고단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픈 도시현대인의 피로감 때문일까?
 
1908년 1월 탐사를 끝낸 아르세니예프는 노안으로 사냥을 잘 하지 못하게 된 데르수를 하바롭스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그러나 도시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던 데르수는 다시 숲으로 돌아가려 하고 아르세니예프는 그에게 최신식 사냥총을 선물한다.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간 데르수가 살해된 것은 이 총 때문일 거라고 아르세니예프는 괴로워한다. 모닥불을 피우고 잠든 그가 이 총과 돈을 노린 러시아인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기념비 제막식 때의 모습이 궁금해 사진을 받기로 했다. 휴가 때마다 타이가 숲에 간다는 알렉세이 씨는 휴대폰도 이메일도 사용하지 않아 다시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다. 귀국 두 달 후 그의 집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는데, 통화가 된 그의 어머니 발렌티나 씨가 자신의 모바일 메신저로 사진을 보내 준다. 아들과 달리 그녀는 스마트폰 사용자였던 것이다!
 
1997년 꼬르폽스키 마을의 데르수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한 사람들. 극동의 저명한 작가이자 지역연구가인 브세볼로드 씌소예프의 모습도 보인다(오른쪽 끝).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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