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6화)작은 탐험의 시간
입력 : 2019-10-28 00:00:00 수정 : 2019-10-28 00: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2019년과 1993년의 기억
 
‘이젠 뭐하지?’ 데르수의 기념비를 보고 난 후 나는 잠시 생각했다. ‘마을 안으로 더 들어가기 전에 물부터 사자.’ 뜨거운 해에 지친 나는 기념비 옆 식료품 가게에서 물 한 병을 사 그 자리에서 다 마신 후 다시 한 병을 샀다. 이토록 한적해 보이는 시골 마을에서 다음 가게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나중에 개인주택들을 지나 아파트형 주거지에 이르렀을 때 그 건물 1층에 있는 가게에서 한 번 더 물을 살 수 있었는데, 많이 걸어 들어간 만큼 마을 입구보다 가격이 비쌌다.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가 만난 할머니와 인사를 나눈다. 시골의 노년 여성들은 대부분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사실, 꼬르폽스키 마을은 러시아 지자체의 한 유형인 ‘도시형 촌락’으로, 2019년 현재 인구가 5800명이 넘는 큰 규모이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기차역 부근과 교회 근처의 주거지, 숲 일부뿐이니 코끼리 다리만 만지고 온 셈이다. 우수리 지방에 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이주자들의 정착지로 마을이 생겼고 이곳은 아무르 지역의 첫 번째 총독이었던 꼬르프 남작의 이름을 따 꼬르폽스키로 이름이 지어졌다. 꼬르폽스까야역이 세워진 게 1897년이고 데르수가 살해된 게 1908년이니,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한창 마을이 개발될 때였을 것이다.
 
데르수의 기념비 외엔 아무런 정보도 없었던 터라 마을 지리도 알 리가 없는 나는 무작정 멀리 보이는 산 쪽을 향해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간간이 대형 트럭들과 승용차들이 달려가는데, 트럭이 많이 다니는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스카프 쓴 할머니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면 답인사를 한다. 오토바이를 탄 한 무리의 소년 내지 청년들이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며 미소와 함께 숲길로 사라진다.
 
1993년 1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동네 아이들도 지나가는 이방인이 신기해 나를 따라오며 웃었지만 지나친 호기심인지 혹은 경계심인지 이유 없이 내 쪽으로 돌멩이를 던졌던 적이 있다. 당시 3대가 함께 사는 고려인 가족 집에서 신세를 지던 나는 언짢은 기분으로 돌아와 며느리인 2세대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당신처럼 생겼는데 왜 우즈베크 아이들이 내게 돌을 던지지요?” 우즈베크인들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땅을 일구며 살아온 고려인들을 높이 평가하고 좋은 관계로 지낸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당신은 우리하고 다르게 생겼어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른 환경이 같은 민족의 인상을 다르게 만들어 놓았다. 알지도 못하던 나를 단지 조국 땅에서 온 동포라는 이유로 며칠간 먹여주고 재워준 그 고려인 가족을 찾아내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이 길 저 길, 도로로 걷다가 숲길로 걷다가 하면서 문득 의문이 든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온갖 정보를 미리 습득하고 스마트폰 앱으로 길을 찾아다니는 게 익숙한 우리들이 예전에는 도대체 어떻게 여행을 했을까? 한글로 된 여행안내서도 구하기 힘들었던 그때는? 1993년 새해를 맞이한 이르쿠츠크에서 선배 언니가 먼저 모스크바로 돌아간 후, 나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동진을 계속하지 않고 기차의 방향을 꺾어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인터넷은 물론 없었고 가이드북도 갖고 있지 않았던 내가 방향을 튼 이유는 단지 주변의 한국학생들이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한 사마르칸트와 부하라가 좋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서였다. 아날로그 시절 여행지 정보를 얻는 방법은 사람들이 말로 전하는 경험담과 종이 지도, 다니면서 계속 묻기일 것이다. 부하라는 포기하고 모스크바로 돌아왔지만, 소련 붕괴 이후 민족주의가 강하게 살아나던 우즈베키스탄의 공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꼬르폽스키 마을 안의 러시아 정교회 사원. 사진/필자 제공
 
일요일 마을 풍경과 소년소녀 커플
 
빨래 널린 집, 버려진 빈집을 지나 이 길 저 길을 가다보니 멀리 들판에 서 있는 러시아 정교회 사원이 보인다. 예배당 뜰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이방인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피하는데, 한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 개구쟁이 분위기로 다가와 생글거린다. 일요일이라 성찬 예배를 마친 마을 주민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몇몇 여성들은 성당 옆 꽃밭으로 가 일을 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는 가톨릭교회보다 더 엄격하고 보수적이다. ‘러시아성’을 강조하는 민족적 색채도 강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러시아 정교회 사원에서 성찬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마을 주민들. 여성은 머리에 스카프를 꼭 써야 한다. 사진/필자 제공
왠지 말 붙이기 힘든 서늘한 거리감을 느끼며 그곳을 떠나 좀 더 걸어가니, ‘대조국전쟁 시기 소비에트 조국을 위해 전몰한 마을 주민-영웅들에게’라는 기념비와 전몰자 명단이 있다. 주민들을 위한 ‘문화레저센터’도 보인다. 센터 건물 옆에는 ‘꼬르폽스키 석재 채석장 100주년’이라 쓰인 거대한 바위가 놓여 있는데, 1907년이라는 숫자와 함께 채석장의 노동 현장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꼬르폽스키 마을은 헤흐찌르 산맥이라 불리는 두 개의 나지막한 산, 즉 큰 헤흐찌르와 작은 헤흐찌르 사이 골짜기에 위치하는데, 이 헤흐찌르산에서 끊임없이 채석(採石)이 행해져 석재(石材)를 제공해 왔다. 대형트럭이 많이 다니는 이유이다.
 
‘꼬르폽스키 석재 채석장 100주년’ 기념비. 1907년에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기념 바위 위에 채석장 현장이 그려져 있고바위 옆에서 어린이들이 놀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길도 물을 겸 이번에는 집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계속 걷는다. 어떤 집 앞에서 십대 후반의 소년소녀가 이야기 중이다. 방해될까봐 조심스레 물었다. “저... 숲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있을까요?” 소년이 설명하다가 어렵겠다 싶었는지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서며 소녀에게 같이 가자고 재촉한다. 해가 쨍쨍하던 날씨는 먹구름이 몰려와 있지만 여전히 무덥다. ‘이 무더위에 저런 친절을?!’ 감동했던 나는 얼마 후 소년의 숨은 뜻을 파악하고 싱긋 웃었다. 소년은 마을을 벗어나 소녀와 데이트를 하고 싶었는데 외지인이 불쑥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숲길을 안내하는 엘랴와 니키타.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도 지나가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소년 니키타 로샤꼬프와 소녀 엘비라(엘랴) 뱌좁쩨바가 길안내 겸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보니 빛나는 청춘들이 사랑스럽다. 우리네 청춘들도 도시보다 시골 마을에서 데이트하기가 더 쉽지 않았으리라.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아는 이웃 사이라면 더더욱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들이 로미오와 줄리엣 집안이 아닌 이상 숨길 일이 무엇이랴. 엘랴와 니키타는 그들의 이름과 사진을 사용하는 것에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참고로, 이 연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사진은 모두 동의를 구한 것임을 밝혀 둔다.)
 
 “데르수 우잘라를 아세요?” 그들의 대화에 방해되지 않게 멀찍이 뒤떨어져 걷던 나는 기회가 되었을 때 질문을 던졌다. “학교에서 배웠어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영화의 일부를 보여 주었는데 오래 되어 기억은 잘 나지 않아요.” 이들은 극동 민족들의 문학과 문화에 대해 조금 배운다고 했다. 극동 지역에 사는 러시아인들이니 공존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저 위에 돌산이 보이죠? 채석장이에요.” 소년소녀가 손을 들어 멀리 회색으로 뿌옇게 보이는 산을 가리켰다. 헤흐찌르의 일부이다. 20세기 초에 시작된 벌목은 아무르강에 다리를 놓고 마을에 집을 지었다. 그리고 채석장의 돌들은 철도를 만들었다.
 
“저쪽 숲 속에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모르지만 예전에 이 지역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이 있어요. 가보실래요?” 니키타가 말했다. “그럼요! 고마워요.” 숲에 자주 가는 그가 예전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혹시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일까? 러시아 내전(적군과 백군의 전쟁) 중에 희생된 이들일까 아니면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일까?’ 혹시 최초로 발견하게 되는 한국인의 비석은 아닐까 하는 약간의 기대를 안고 나는 두근두근 설레기 시작했다.
 
마을 뒷편으로 멀리 헤흐찌르산의 채석장이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하지만 가는 길은 녹록치 않다. 평지만 있는 게 아니어서 꼬불꼬불한 숲길은 고갯길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게다가, 이들이 ‘파우뜨’라 부르는 말파리들이 쉴 새 없이 달라붙어 고개를 휘젓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40분은 족히 걸어간 듯싶다. “괜찮아요?” 미안한 마음에 내 앞에서 팔을 내저어 말파리들을 쫓는 엘랴에게 물었다. “우리는 익숙해요.” 나와는 달리, 확실히 그녀는 가끔씩만 휘젓고 있다. 중간 중간 채석장 노동자인지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 울퉁불퉁한 숲길을 오토바이로 지나간다. 드디어, 니키타가 말한 비석에 다다랐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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