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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4화)꼬르폽스키 마을, 데르수 우잘라의 시간을 찾아서
2019-10-14 00:00:00 2019-10-14 00: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하바롭스크역 앞 광장에 세워진 탐험가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동상이 기차역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공원에서의 대화
 
오후 5시 20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기차는 다음날 아침 7시 2분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 나는 배낭을 메고 곧바로 다음 목적지로 출발할 것인지, 일단 숙소인 호스텔에 짐을 두고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올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꼬르폽스키로 가는 7시 10분 출발 교외선을 타려면 종일 무거운 배낭을 메고 돌아다녀야 한다. 대신, 빨리 도착하는 만큼 마을에 좀 더 머물 수 있다. 역내 짐보관소에 맡길까도 생각했지만 8분 내에 짐을 맡기고 다음 기차로 달려가는 것은 무리다. 나는 숙소에 들렀다가 9시 기차를 타는 쪽으로 결정했다. 혹시 몰라 호스텔을 일부러 역에서 도보 20분 거리에 잡아두길 잘했다.
 
숙소로 갈 때처럼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도 아무르 가로수길(아무르스키 불바르) 공원을 거쳤다. 기차역 맞은편에서 아무르 강변까지 연결된 길고 널찍한 공원이다. 공원 의자에 앉아 전날 블라디보스토크 야외시장에서 산 흑빵과 치즈 남은 것을 아침식사로 먹고 있는데, 노숙자처럼 보이는 한 시민이―외견상 슬라브족 러시아인이 아닌 다른 민족 출신으로 보인다―다가와 말을 건다. 전날 밤의 잔해일 것 같은 술병과 노숙인들만 드문드문 보이는 이른 아침의 공원에서 외국인이 초라한(?) 모습으로 빵을 뜯고 있는 모습이 의아해서일 것이다.
 
국적이 다른 초췌한 두 시민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1999년 체첸전쟁에 참여했어요.” 내가 권하는 빵을 사양하면서 그가 말한다. “정말이요? 체첸전쟁은 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 일어났는데요...” 내가 기억하는 체첸전쟁은 1994년 12월에 발발한 제1차 전쟁이고 그가 말하는 것은 1999년에 일어난 제2차 전쟁이다. 기자도 아닌 학생이었지만 취재 욕구가 발동해서인지 나는 뉴스에 늘 흘러나오는 ‘체첸’에 가보고 싶었고, 학기가 끝난 어느 날 그 방향으로 길을 떠났다. 연도가 가물가물하지만 1996년 8월까지 지속된 1차 전쟁 기간 중에는 아마도 불가능했을 터라, 학업을 마치고 완전히 귀국하던 해인 1997년 여름이었을 것 같은데, 결국 체첸공화국까지는 가지 못한 채 까프까즈(코카서스) 산맥에 위치한 카라차예보-체르케시야 공화국의 돔바이와 만년설 엘부르스산만 보고 왔던 기억이 있다.
 
말을 이어가던 그는 체첸전쟁에서 입은 부상이라며 팔에 난 흉터를 보여준다. “나는 전쟁터에서 고생을 하고 돌아왔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어요. 현 정부는 독재정권입니다. 마피아와의 유착관계도 여전하고요.” 여정에서 만난 많은 이들이 푸틴 대통령은 부패 관료를 척결하고 마피아와 결탁된 세력을 제거했다고 칭찬하면서 지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이 전쟁참가자 같이 생각하고 푸틴을 비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만난 나의 오래된 친구 레나와 그녀의 어머니도 모녀지간이지만 푸틴 정권에 대해 서로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가족 내 정치적 이견이 부르는 갈등은 우리나라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하바롭스크의 아무르 가로수길 공원에는 전차(트람바이)가 다니는 길이 있다. 사진/필자 제공
 
데르수 우잘라와 아르세니예프의 우정
 
더 얘기하고 싶어 하는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기차 시각이 임박해 서둘러야 했다. 꼬르폽스키로 가야 한다는 나의 말에 그는 더욱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이 작은 마을에 가려는 이유는 그곳에 나나이족의 사냥꾼 데르수 우잘라(1849?~1908)의 기념비가 있기 때문이다. 만주족(여진족)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나나이족은 퉁구스계 소수민족으로 아무르강(흑룡강), 우수리강, 송화강 지역에 거주했던 종족이다. 중국에서는 허저족으로 불리고 러시아인들이 불렀던 옛 명칭은 ‘골드’여서 데르수가 아르세니예프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골드’라 소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바롭스크에서 꼬르폽스키로 가는 교외선 안. 빨간 제복을 입은 승무원이 승차권을 검사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우수리 지방(현 연해주 대부분과 하바롭스크주의 일부) 출신인 데르수는 천연두로 처자식을 잃고 타이가 숲에서 모피동물을 사냥하며 홀로 살아간다.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1872~1930)는 제정 러시아의 군인이자 극동지역 탐험가, 지리학·민족지(誌)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는 부대원들을 이끌고 우수리 지방과 시호테알린 산맥을 탐사해 동·식물과 지형을 기록하고 지도를 작성했다. 이는 군사적 목적과 더불어 야생의 극동지역을 이른바 ‘문명화’하기 위한 토대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연한 만남으로 이 탐사대의 안내자가 된 데르수는 그가 늘 ‘까삐딴(캡틴)’이라 부르는 아르세니예프와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아르세니예프는 위험 가득한 오지에서 함께 생사를 넘나들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던 데르수를 책을 통해 세상에 알렸다. 1921년에 출판된 <우수리 지방에서(데르수 우잘라)>는 1902년과 1906년 탐사 당시 자신이 작성한 일지를 바탕으로 쓴 것인데, ‘시호테알린의 산악지역으로의 여행’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923년에 발간된 <데르수 우잘라>는 1907년의 탐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로, 이 역시 ‘1907년 우수리 지방 여행에 대한 회고로부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이 두 책 모두 집필은 1917년에 완성되었다). 
 
아르세니예프는 <우수리 지방에서>의 초판 서문의 주석에서 데르수 우잘라의 본명이 ‘데르추 어잘’임을 밝힌다. 그의 책 <데르수 우잘라>에 기초해 1961년 소련 감독 아가시 바바얀이 영화 <데르수 우잘라>를 처음 만들었고, 1975년에는 소련영화사 모스필름의 제안을 받은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새로운 <데르수 우잘라>를 만들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데르수를 만나러 가는 교외선 안
 
‘숲(의) 사람’, 아르세니예프가 데르수를 칭했던 말이다. 타이가 숲의 ‘자연인’ 데르수의 무엇이 아르세니예프를, 그리고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일까? 그는 모든 자연물 속에 깃든 정령을 믿었고 그들과 교감할 줄 알았다. 해도 달도 불도 물도 바람도 그리고 모든 짐승들도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다. 새가 지저귀면 비가 곧 그칠 것을 알았고 발자국 흔적으로 앞서 간 사람을 추리해 냈으며, 내가 떠나는 자리에 새로 올 이들을 위해 약간의 쌀과 소금과 성냥을 준비해 두는 마음을 가졌다. 데르수의 매력에 대해서는 잠시 후 다시 돌아오기로 하자.
 
꼬르폽스까야역. 7월 21일을 표시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마을 이름은 꼬르폽스키지만 기차역 이름은 러시아어의 특성상 꼬르폽스까야가 된다. 하바롭스크역에서 꼬르폽스까야역까지는 교외선으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기차 안에는 친절하고 유쾌한 승무원이 표 검사를 하고 있다. ‘엘렉트리치까’로 불리는 이 교외선을 보니 소련 영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1979)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주인공 카테리나, 그녀는 자신이 대학교수의 딸이 아니라 공장노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텔레비전 카메라맨에 의해 임신한 채 버림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홀로 딸을 키우며 억척스럽게 학업까지 마친다. 20년 후 공장의 지배인이 되어 성공한 삶을 사는 듯하지만 때로는 외로움에 시달리던 그녀가 새로운 사랑을 우연히 처음 만나게 되는 곳이 바로 이 교외선 안이다.
 
도시에서는 정장을 갖춰 입는 공장 지배인이지만, 시골의 친구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카테리나의 머리에는 시골 여성들이 흔히 쓰는 머리 수건이 씌워져 있다. 마주 보고 앉게 된 중년의 남녀 주인공들이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그들이 앉아 있던 좌석은 딱딱한 나무의자였는데, 그것이 매우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았다, 정감 있는 나무의자가―물론 오래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납작해지고 통증이 느껴지겠지만―도시와 시골 사이를 오가는 교외선에 잘 어울려 보였기 때문이다.
 
꼬르폽스카야역에서 공사 중인 노동자들. 사진/필자 제공
 
꼬르폽스키 마을로 가는 교외선의 좌석은 더 이상 나무의자가 아니지만, 정감 있는 느낌은 비슷하다. “꼬르폽스까야역입니다.” 안내방송이 따로 없다 보니 이방인이 모르고 지나칠까봐 승무원이 일부러 다가와 알려주고 간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열차에서 내리니 몇몇 노동자들이 무엇인가 공사를 하고 있다. 무조건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인사를 건넨 뒤 선로를 가로질러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시골마을의 오전은 몹시도 한적하다. 대문이 열려 있는 집 안쪽 마당에는 한 여성이 빨래를 널고 있다. “실례합니다. 데르수 우잘라의 기념비는 어디 있나요?” 그녀가 나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려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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