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밤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나라가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푸틴 한 사람이 25년째 집권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 같은 나라가 "한국의 계엄령 선포 이후 상황이 우려스러우며 우리는 이를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고 합니다.
역시 전쟁 중인 이스라엘이 러시아와 함께 '한국 여행 주의보'를 내렸습니다. 이들뿐이겠습니까? 일본, 미국, 영국 등도 한국을 여행 위험 국가로 지정했습니다. 'K-Culture' 문화 선진국이 하룻밤 새에 위험한 나라로 전락해 버린 겁니다.
'K-Culture' 문화 선진국이 하룻밤 새 '여행 위험 국가'로 전락
당연히(?) 전 세계 모든 언론이 중요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미국 <CNN>은 지난 3일 "북한이 아닌, 한국 이야기"라며 계엄령 선포 뉴스를 전했고, 통신사 <AP>는 윤석열 대통령을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권위주의적 지도자(authoritarian leaders)를 연상시킨다"고 했습니다. 1당 지배 국가인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서울의 겨울: 윤석열의 6시간 계엄령 희극"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 기사가 "굴욕으로 끝난 셀프 쿠데타", "정치적 자살 행위"라는 내용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6일 방한 예정이던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 및 부처 장관들이 일정을 연기했고, 이달 중순으로 잡혔던 스가 요시히데 전 일본 총리의 방문은 취소됐습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도 내달 방한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불투명해졌습니다.
한국 기업 주가가 폭락하지 않을 리 없고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한국으로부터 계엄령 발표 사전 통보를 못 받았다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내놓고 있는 반응은 민망해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국 국회에서 계엄 해제를 가결한 뒤 미 국무부는 "준수되길 희망한다"고 입장을 냈습니다. 윤 대통령이 국회 결의를 거부하고 계엄을 고집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불안감을 갖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새벽에 들어온 이 속보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미국이 윤석열을 견제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아직도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인가, 여전히 미국 한마디에 일희일비할 수 없는 수준인가"라는 자괴심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대변인이 "민주주의는 한·미 동맹의 근간"이라며 "우리는 계속해서 상황을 주시할 것"이라고 하고,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한국 내 상황을 계속해서 면밀히 주시하겠다" 하고,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 대사가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한국의 민주적 절차를 굳건히 지지한다"고 했을 때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 중국, 북한 등 권위주의 국가에 맞서 민주주의를 강화하겠다며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만들었는데, 윤 대통령은 이 회의의 주요 멤버였습니다. 한국은 2차 회의에 공동 주최국으로 참여했고, 3차 회의는 단독 개최국으로 나서 서울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으니,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도 난감한 상황입니다.
미 국무 부장관 "매우 불법적인 과정" 비판…정부, 반박도 못해
아시아 정책을 담당하는 커트 캠벨 미 국무 부장관의 4일 발언은 외교 책임자가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는 계엄 선포를 "심한 오판"(badly misjudged)이라고 평가했고 "사람들이 나와서 이것이 매우 불법적인(illegitimate) 과정임을 분명히 할 준비가 돼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한국인들이 한 행동을 전하는 화법이었지만 사실상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불법'이라고 비판한 겁니다. 그는 전날에도 "우리는 중대한 우려(grave concern)를 갖고 최근 한국의 상황 전개를 주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보통 상황이라면 주한 미 대사를 초치하고 대통령실이 성명을 내고, 난리를 칠 일이지만 도통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외교부 대변인이 "한·미 간 각급에서 필요한 소통을 하고 있다"고 답할 뿐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3일 저녁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밤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계엄군이 국회 본청으로 진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도 국회가 난입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대선 패배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 세력이 2021년 1월 6일 의사당을 난장판으로 만든 겁니다. 그나마 미국은 무장한 난동을 공권력이 진압했으나, 한국은 무장한 최정예 병력이 투입됐고 시민들이 이를 막아섰습니다.
트럼프가 돌아왔습니다. 1기 때보다 훨씬 강해졌습니다. 대통령 경험을 갖고 있는데다, 대선에서 넉넉하게 이겼으며, 상원과 하원, 그리고 연방대법원까지 장악했습니다. 그런 트럼프를 상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취임 즉시 멕시코와 캐나다산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산 제품에 10% 관세를 추가로 부과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이에 놀라 찾아온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에게는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라"고 막말을 합니다.
3일 계엄령 파동 이전에 한국은 '트럼프 포비아' 대비에 전전긍긍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두 번째 문제입니다. 내부 리더십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 도저히 대응할 수가 없습니다. 내부가 단단하면 외부 요인은 대응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트럼프 같은 인물에게 한국은 만만한 호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2016년~2017년 '박근혜 탄핵' 때 유사한 경험을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할 때 한국은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였습니다. 혹한 속에 연인원 1700만 명이 촛불을 들어 탄핵을 완성했고, 평화롭게 새로운 정부가 등장했습니다.
한국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민주주의 모범국으로 칭송받으면서 그 이전보다 국제적 발언권, 영향력이 더 커지지 않았습니까?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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